a piece of Helsinki
2016.08.23. 화요일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이 눈부시다 생각했는데, 하늘엔 구름 한 점 없다. 오늘은 가보고 싶었던 곳들을 찾아 헤맬 예정이다. 1일권 트램 티켓을 사야 하는데, 판매기를 찾지 못해 중앙역까지 산책 겸 걸어갔다. 시차가 뭔가 싶게 몸도 가볍고, 바람도 살랑인다. 꽤 좋은 하루의 시작이다.
트램을 타고 처음으로 향한 곳은 암반을 깎아 만든 암석 교회. 들어서는 입구가 상당히 북적인다. 헬싱키에서 처음 목격한 트래픽이라 꽤 당황했는데, 한 바퀴 천천히 둘러보고 2층으로 올라오는 새 한산해졌다. 곧 하프 연주가 시작됐다. 콘서트 홀로 쓰일 만큼 울림이 멋진 공간이라길래, 2층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눈앞에 창의 빗살을 따라 빛이 그림자를 드리운다. 이곳은 소리보단 빛이구나. 기분 좋게 빛을 쬐다 보니, 어느새 미사 시간이다. 그런데 이건 미사가 아니라 핀란드 역사 강의다. 해설사 못지않은 목사님의 강의를 잠시 듣다가 밖으로 나왔다. 교회가 자리 잡은 큰 돌덩이 위로 올라가 또 한참을 앉아 있었다.
이제 동쪽으로, 다시 헬싱키 중심가로 걷기 시작. 영화관을 지나고,
버스 터미널이 있는 캄피 광장이다. 헬싱키에 뭐가 있나 여기저기 뒤적일 때 사진으로 봤던 그 방주가 광장 한편에 서 있다. 상당히 큰 건축물이 우뚝 서 있는데, 위압적이란 인상이 전혀 없다. 오늘 같은 하늘을 배경으로, 나무색이 유난히 예뻐 보여 신나게 사진을 찍었다.
신나서 방주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그 한순간에 압도 당했다. 시끌벅적한 광장에서 작은 문 하나를 넘어오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침묵 그 자체였다. 장식이나 기교 없이, 단순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내부엔 소리 없이 천장의 빛만 쏟아졌다. 숨소리마저 조심스러워, 잘게 숨을 나눠 뱉고 또 들이마셨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외부와 차단된 좁은 공간, 그리고 그곳을 가득 채운 고요와 빛이 세상 모든 것을 향한 방패가 되어 날 보듬어 주는 것 같았다. 삶이 많이 힘들고 지치는 날이 오면, 그땐 다시 이곳을 찾아야지. 이렇게, 안전하게 숨어 스스로를 돌볼 수 있는 보석 같은 공간이 하나 더 생겼다.
꽤 오랜 시간을 보내고, 다시 밖으로 나와보니 광장은 여전히 떠들썩하다. 이케아에서 무슨 이벤트를 하는지, 노란 풍선이 잔뜩 부풀어 오르고 있다. 누가 봐도 '나 하나 주세요'하는 표정으로 눈빛을 쏘며 다가갔다. 역시나 갖고 싶냐고 물어본다. 암요, 2개 주세요!! 노란 풍선 손에 들고 깡충깡충 또 길을 나선다.
아침 일찍 일어나 열심히 걸었으니, 에너지를 보충할 차례. 찜 해둔 음식점이 근처에 있을 텐데, 둘 다 폰이 꺼졌다. 다시 켜봐도, 유심 비번을 안 적어둬 찾아볼 수 없는 상황. 그래도 기억을 더듬은 것치곤 꽤 빨리 식당을 찾았다. 헬싱키 이제 접수했다 이거야! 연어 수프, 시나몬롤, 호텔 조식에 이은 식사니까 제대로 핀란드 요리를 먹는 건 처음이다. 예측할 수 없는 음식이었는데, 기대 이상의 맛이었다. 아기자기한 마리메꼬 컵은 거들 뿐!
아침에 트램을 타고 암석 교회까지 가서, 숙소 방향으로 오전 내내 걸은 셈이다. 유심 비번을 찾을 겸 잠시 호텔에 들렀다. 어제의 뼈아픈 교훈을 되새기며, 저녁에 먹을 맥주도 미리 사서 냉장고에 모셔뒀다. 그리곤 대낮의 방이 새삼 예뻐 뒹굴뒹굴하며 괜한 시간을 보냈다.
쉬었으니 또다시 나가볼까.
신나서 향한 곳은 마리메꼬 아웃렛. 잠시 넋을 잃고 이 컵, 저 그릇, 이 옷, 저 앞치마 사이를 헤매기 시작했다. 살림꾼 모드로 고르고 고른 아이템은... 지금 내 등을 받히고 있는 쿠션의 커버, 청어 패턴의 오븐 장갑, 티 테이블 위에 둘 빨간색 보, 그리고 도트 패턴의 냄비 받침 이상 끝!
마리메꼬 다음은 아라비아 팩토리다! 외곽지역을 크게 빙 둘러 가는 길, 왔던 길을 돌아가는 길 중 선택은 늘 가보지 않은 길이다. 자꾸 숲이 나오고, 주변에 자작나무가 점차 무성해진다. 역시 자일리톨의 나라인가. 중심가에서 보기 힘들었던 아파트를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창밖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정류장에 들른 버스가 좀처럼 출발을 하지 않는다. 급기야 기사님이 내리시길래 뭔가 했더니, 거동 불편한 할아버지를 부축해, 승차를 돕고 있었다. 친절한 분이구나 생각했는데, 환승한 버스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휠체어 타신 분의 승차를 돕는 것은 물론이고, 그분이 내릴 때 기사님이 역시나 뒷문으로 달려오더니 경사판을 직접 대준다. 그동안 다른 사람들은 알아서 교통카드를 찍고 버스에 오른다. 의식하고 보니, 어제부터 지금까지 지나쳤던 모습들이 떠올랐다. 뒷사람이 올 때까지 문을 잡고 기다려주는 사람들, 게이트가 없어도 알아서들 지하철 티켓을 찍는 사람들... 나도 모르게 눈에 깊숙이 담았나 보다. 한 사람의 친절함이 아니란 걸 그때 알았다. 구성원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안정적이고 안전한 시스템이 일상 곳곳에 자리 잡은 것이었다. 여행 마지막 날까지 '사람이 먼저다'라는, 다른 그 무엇 아닌 사람에 대한 존중과 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헬싱키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아라비아 팩토리 도착. 건물 외관부터 멋스럽다. 분명 아웃렛인데 가격이 한국과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할인 상품도 몇 개 있긴 한데, 예뻐서 눈에 콕 들어온 게 할인 상품일 리는... 없었다. 가격보다는 컬러가 한국에서 보기 힘든 게 많아 한참을 구경하고, 시티 머그를 살 것이냐 말 것이냐 또 한참을 고민했다. 결국 대만에서 산 그릇을 공항에서 깨먹은 기억을 떠올리며, 과감하게 빈손으로 나왔다. 한국에서 사지 뭐. (이래놓고 여행 마지막 날 마리메꼬 매장에서 그릇을 잔뜩 샀다...)
늦은 오후다. 친구가 추천해준 노을 포인트에서 하루를 마무리할 생각이다. 트램을 타고 바다 쪽으로 향한다.
시벨리우스 공원을 가로질러 걷기로 한다. 누가 봐도 나 핀란드에요 하는 자작나무 숲이 펼쳐졌다.
파이프오르간 기념비니까 눈도 갖다 대 보고, 소리도 아 아 질러보고~
숲이 잦아드는 곳에서 하늘과 바다가 시작된다. 저 먼 하늘부터 붉게 물들기 시작하는, 딱 좋은 타이밍에 맞춰 카페 레가타에 도착했다. 동화 속 집 같은 외관에 감동하면 너무 이르다. 이곳의 매력은 카페 문을 여는 순간 절정을 이룬다. 나무 장작 타는 냄새가 은은히 깔리는 가운데 시나몬 향이 코끝을 찌르며, 외부와 단절된 새로운 공간이 펼쳐진다. 후각만으로 먼 여행을 떠나온 것 같다. 뭐 먹을래 물어보는 점원에게 무의식적으로 시나몬롤! 을 외친다. 야외에 자리 잡고 앉아, 노을을 감상하며 시나몬롤 한 입, 커피 한 모금. 여기가 지상낙원인가 보다.
벌써 8시가 넘었다. 해가 늦게 지니, 시간 감각도 덩달아 무뎌진다. 이왕 멀리 나온 거, 그쪽 동네의 대표 레스토랑인 kuu에 가기로 했다. 시나몬롤은 저녁이 아니니까요...
저녁 메뉴는 핀란드 스타일로, 연어 수프, 순록 스테이크, 연어 스테이크 조합이다. 순록 스테이크... 밤비에겐 미안하지만 제가 한 번 먹어보겠습니다. 음식 잘 하는 곳이라 그런지, 냄새는 하나도 나지 않았고 맛있었다! 맥주 한잔 곁들이면 굿굿. 친구와 서로 못 먹는 음식, 싫어하는 음식을 번갈아 대며 맛난 음식을 먹으니 더 맛있는 느낌적 느낌이랄까.
저녁 식사가 상당히 길어졌다. 하루가 길었던 만큼 할 이야기도 많았다. 밖으로 나오니 깜깜하다. 이제 숙소로 돌아갈 시간. 오늘 하루도 참 알차게 잘 놀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