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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희수 Jun 05. 2022

터미널

내가 터미널에 온 이유는 친구 아버지의 부탁이 있었기 때문이다. 친구는 출장을 자주 다녔다. 출장을 갈 때 자가용보다 고속버스나 기차를 이용했다. 과로한 일 때문에 졸음운전이 있었기 때문이라했다. 이번 출장도 고속버스를 이용했다고 한다. 버스 전복 사고. 생존자 없이 모두 죽었다. 장례식장에서 친구의 아버지는 출장을 위해 옮긴 숙소의 짐들을 가지고 와달라고 했다. 자기가 가면 될 것을 왜 나한테 부탁하나 싶었다. 곤란한 상황이다. 평일에는 물론이거니와 휴일에도 지방까지 내려가서 짐을 챙겨 오기 싫기는 마찬가지. 이삿짐센터에 맡겨 보시는 게 어떤지 물어봤다. 굳은 표정, 실망한 듯하다. 자신은 바삐 칠레로 돌아가야 하고 유일하게 부탁할 사람이 나밖에 없다고 한다. 돈이 아까운가 생각했다. 안타깝게도 안된다고 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 친구가 겪은 사고 뉴스가 라디오에서 들렸다. 시속 100km로 달리는 차 안에서 위험한 생각이 들었다. 달리는 고속도로 한복판 백미러로 보이는 차. 지금 핸들을 급하게 꺾으면 나도 죽겠지. 친구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곳이 어딘지 물어봤다. 


비가 오는 터미널 청주로 향하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는 출발하기 전부터 승객을 태웠다. 미리 버스에 탔다. 많은 승객들이 캐리어나 짐가방을 갖고 있었다. 나는 짐이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생기겠지. 청주로 향하는 버스 막힘 없이 달렸다. 금방 도착했고 나는 배가 고파 근처 햄버거 가게에서 끼니를 때웠다. 친구의 숙소는 걸어서 20분 다른 이동수단을 이용할까 했지만 온 김에 뭐라도 눈에 담고 가고 싶었다. 친구도 이 길을 걸었을까. 바쁘게 살았으니 이 지도 앱에서 알려주는 최단거리로 다녔겠지. 아니면 택시를 타고 다녔을 수도 있다. 번화가를 지나 시장을 지나 아파트 단지를 지나 일층에 만두를 파는 상가형 빌라 앞에 도착했다. 여기 3층. 엘리베이터가 없다. 계단을 걸어 올라가 도착한 3층 정면에 있는 301호 도어록이 없이 열쇠로 잠겨있었다. 친구 아버지가 알려준 대로 왼쪽 소화기 밑을 뒤져보니 키가 나왔다. 열고 들어가니 분리형 원룸이었고 들어가자마자 주방이 보였다. 건조하고 텅 빈 주방. 아무래도 밥은 이곳에서 해 먹지 않았나 보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먹다만 1.5리터 페트병이 있었다. 미닫이 방문을 열었다. 생각보다 넓은 방. 보이는 가구라고는 책장이 하나 있었다. 몇 벌의 옷이 개어져 책장 안에 있었고 침낭과 작은 가방에 책장 옆에 있었다. 화장실에 들어갔다. 칫솔과 치약 그리고 비누. 이것들도 챙겨야 할까 고민했다. 다시 밖으로 나와 편의점에 들어갔다. 음료수와 쓰레기봉투를 샀다. 봉투에 칫솔과 치약 비누를 넣었다. 냉장고 안에 있던 페트병에 물도 다 비우고 쓰레기봉투에 넣었다. 


달리는 버스 안 청주를 향하고 있다. 매주 청주에 내려가는데 매번 재수 없게 옆 좌석에는 남자가 앉았다. 이왕 똑같이 가는 길 이쁘고 젊은 여자가 앉으면 얼마나 좋나. 좌석에 미리 앉아 누구 내 옆에 앉을지 기대한다. 머리 벗겨진 아저씨가 지나가고 내복이 삐져나온 아줌마가 지나가고 대학생으로 보이는 애가 지나가고 20대 여자가 내 옆에 앉았다.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지만 건강한 남자라면 누구나 뒤에서 걷고 싶은 그런 몸매를 가진 여자다. 슬쩍 나는 화장품 냄새에 아랫도리가 따뜻해졌다. 자리를 고쳐 앉는 척하면서 어깨를 대였다. 여자는 핸드폰을 하고 있었다. 점차 적극적으로 몸을 더듬었다. 여자는 나를 보고 싸대기를 때렸다. 나도 주먹을 날렸다. 여자는 쓰러지고 일순간 버스 안은 소란스러워졌다. 뒷 좌석에 앉아있던 대학생이 나를 안았다. 나는 흥분해서 소리를 질렀고 여자를 미친 여자 취급했다. 여자는 곧 일어나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해 이야기했고 언성이 높아졌다. 버스 기사는 우리를 진정시키기 위해 일단 자리에 앉으라고 시켰지만 그렇기에는 그 여자와 내가 내는 소리가 매우 컸다. 여자는 온몸으로 나를 밀쳤다. 나는 버스의 긴 복도에 뒤로 굴러 버스 기사 옆에까지 도달했다. 자칫 잘못해서 앞문 계단으로 떨어질뻔했다. 크게 다칠뻔했다고 생각하니 화가 났다. 다시 나는 그녀에게 폭력을 가할 생각으로 다가갔다. 앞 좌석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일어나 나를 말렸다. 그 사람의 머리를 주먹으로 내려쳤다. 나를 제압하려는 남자들 나는 반항했고 우리는 한 덩어리가 되어 버스 기사를 덮쳤다. 버스의 핸들은 오른쪽으로 쏠려 벽을 뚫고 고속도로 밖으로 추락했다. 


친구의 짐들은 한 캐리어 안에 다 들어갔다. 다시 서울로 올라가기 위해 터미널에 도착했다. 짐들을 챙기면서 친구가 그리워졌다.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이상한 기분을 들게 했다. 올라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나와 몇 개의 벤치로 거리를 둔 곳에 여자 한 명. 그녀는 자기의 몸에 비해 과한 짐을 갖고 있는 듯했다. 버스가 도착했다. 서둘러 타려는데 그녀가 눈에 밝혔다. 무시하기에는 너무 느리고 힘겹게 짐을 옮겼다. 어떻게 여기가지 왔는지도 의아할 만큼이었다. 그녀에게 의사를 묻고 짐을 옮기는 것을 도와줬다. 짐이 많으시네요. 제께 아니라 언니껀데 좀 많네요. 아 그러시구나. 언니는 어디 있는지 묻고 싶었지만 질문이 막혀 나오지 않았다. 버스를 타고 도착한 서울은 어느새 해가 져서 캄캄한 밤이 되었다. 나는 버스에서 내렸다. 그녀도 버스에서 내렸다. 출구까지 짐을 드는 것을 도와줬다. 출구에는 그녀의 가족들이 승용차를 타고 마중 나와있었다. 그녀와 나는 가볍게 인사를 했다. 그녀는 차에 타자 참고 있던 슬픔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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