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박경리 작가님의 <토지>를 3권의 절반까지 읽었다. 서스펜서 & 스릴러 & 호러 & 로맨스 다 들어있는 종합선물세트 같아서 책을 펼치면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한 달에 책 한 권 읽기도 힘들었던 나인데, 이 대하소설만큼은 꽤 빠르게 읽었다. 이렇게 몰입해 있다 보니 이제는 특정 인물에 대하여 애정과 연민이 생기기까지 한다. 특히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인물인 윤씨부인!! 윤씨에게 가졌던 내 오해를 풀고 가겠다.
좌: KBS, 우: SBS, 드라마 <토지> 극중 '윤씨부인'
이 여인은 최참판댁의 가장으로 굳세고 단호한 캐릭터다. 아들로는 최치수가 있지만, 성범죄의 피해로 환이를 임신했다. 환이의 아버지는 김개주(우관스님의 동생)라는 사람인데, 윤씨부인이 절에 불공을 드리러 갔다가 그에게 당한 것이다. 그러다 무당인 월선 어미와 우관스님 등의 비호 하에 절에서 남몰래 출산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님!"
불렀을 때 어머니의 눈은 불꽃이 튀는 듯 험악했다. 그토록 오랜 시일 이별하여 꿈에 그리던 어머니가, 그동안 잘 있었느냐? 하며 부드러운 손길로 등을 어루만져줄 줄 알았던 어머니가 저럴 수 있는지 치수는 눈앞이 캄캄했다.
치수 나이 열세 살쯤이었던가? 절에서 머물다 온 어머니는 몇 달 만에 만난 아들을 본 체, 만 체 했다. 어린 치수는 그 이유를 몰랐다. 계속되는 어머니의 냉정함과 무관심 속에서 그는 고독한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리고 어머니가 절로 떠나야 했던 이유를 스스로 파헤치며 살아간다. 문 의원과 종들의 대화를 엿들은 것을 기반으로 퍼즐의 조각들을 맞춰가던 중, 어느 날 밤 김개주가 윤씨부인 거처에 들어갔다 아무 일도 없이 나오는 현장을 목격하고 확신을 하게 된다. 김개주는 동학당의 무리를 이끌고 마을을 옮겨 다니며 양반의 집들을 파괴하고 있었는데 최참판댁만은 손 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던 것이다.
치수의 소년 시절은 어둡고 고독했다. 허약하여 본시부터 신경질적인 성격은 차츰 잔인성을 띠었으며 방약무인의 젊은이로 성장했다.
그런 치수의 어린 시절은 외롭고 쓸쓸했다. 유일한 혈육인 어머니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니 당연했으리라. 그의 신경질적이고 예민한 성격은 점점 더 냉소적으로 변해 갔다. 말 한마디, 한 마디에는 가시가 돋아 있었고 냉혈한으로 살아갔으니 주변에 사람이 머무를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별당 아씨(치수의 부인)도 환이와 도망을 치고 만다. 두 불륜 남녀가 떠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윤씨부인의 조력이 있었다. 치수가 출타한 틈을 타서 둘이 도망치도록 해준 것이다.
그들 불륜의 남녀를 위해 피신처까지는 마련해주질 못했다. 못했다기보다 안 했었는지도 모른다.
(중략)
어느 편에도 기울 수 없는 저울의 추가 되어 살아왔었다.
그들을 도망가게는 해주었지만, 치수를 생각해서 그들의 거처는 마련해 주지 못했다는 윤씨부인. 치수의 친어머니가 맞나 싶었다. 토지 속 서술에 따르면, 환이를 낳자마자 떼어놓고 떠난 연유로 윤씨부인에게는 그 아이에게 죄책감과 연민이 가득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한쪽에는 치수를, 다른 한쪽에는 환이를 달아 놓은 저울을 마음속에 안고 살아간다.
어느 편에도 기울 수 없는 저울의 추
하지만 나는 이 표현을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치수는 혼례의 결과로 생긴 아들이지만 환이는 원치 않는 임신으로 낳은 아들이기 때문이다. 과연 양측이 같은 선상에 놓일 수 있을까? 환이에게 사랑과 연민을 느끼는 까닭의 저편에는 김개주와의 로맨스가 있지 않았나 의심을 했을 정도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읽은 부분에서는 그런 썸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단지 "겁탈"로 표현되었을 뿐이다. 여하튼간에 치수는 불륜 남녀가 지리산에서 숨어 지낸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을 사냥하러 산으로 떠난다.
윤씨부인은 무수히 달려온 아들과의 감정대립 속에서도 한 번 느껴본 일이 없는 증오감 같은 것을 느낀다.
'오냐, 쫓아보아라. 환이는 네 손에 잡히지는 않을 게다.'
이 대목을 읽었을 때, 윤씨부인에게 치수는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인 듯했다. 그 반대로 환이는 아픈 손가락이 되고 말이다. 윤씨부인의 무정함에 놀랐고, 치수가 더없이 안쓰러웠다. 차라리 윤씨부인이 치수를 조금 더 보듬어 주었으면 어땠을지, 그러면 치수가 더 나은 사람이 되지 않았을지 생각해 봤다. 치수가 사랑 속에서 자랐다면 오붓한 가정을 꾸리고 별당 아씨, 그리고 딸 서희와 함께 행복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나는 윤씨부인을 이해하지 못한 채 2권을 끝냈다. 2권 말미에 환이는 우관스님이 마련해 준 은신처에서 별당아씨와 지내게 된다. 불행히도 치수는 평산이에 의해 살해되고 만다. 전개가 빠른 탓에 귀녀를 비롯한 악인들의 음모가 발각되어 체포되는 장면까지 거침없이 이어졌다. 그렇게 나는 3권으로 넘어갔고, 비로소 윤씨부인이 처한 상황 묘사에서 그녀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사십 년 가까운 세월을 최씨 가문에 머슴살이를 했다는 기분에서, (중략) 결국 자기는 최씨 문중의 사람이 아니었고 다만 타인, 고공살이에 지나지 않았었다는 의식은 그의 죄책감을 많이 무마해주는 결과가 되었다. (중략) 자기의 권위와 담력과 두뇌는 오로지 최씨 문중에 시중하기 위한 가장에 지나지 않았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윤씨부인은 최씨 가문의 광활한 농토를 관리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토지를 빌려주는 대가로 곡물을 거둬들였던 것이다. 지금으로 치면 중견기업 규모의 금융사 여회장님이 아니었을까 싶다. 치수는 성병에 걸린 후로 몸이 급격히 쇠약해지고, 속박을 받기 싫어 재산을 관리하는 일을 배우려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그의 어머니 윤씨가 계속해서 가장의 역할을 해왔다. 남편을 잃고 성범죄를 당했음에도 자신이 살아야 했던 단 하나의 이유. 그것은 바로 최씨 가문을 지키는 일이었다. 가업에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며 흔들림 없이 업무를 수행한 나머지 최씨 문중에 "머슴살이"를 해왔다고 여겼을 정도다. 그래서 환이라는 존재에 대한 면죄부도 얻었다고 생각했을 것 같다. 다른 한편으론, 치수를 지켜보는 것 이외에 사랑으로 보듬을 여력은 없었을 테고.
'피곤하구나.'
자기에게 최후가 가까이 오고 있다는 예감은 그에게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서희에게 가업을 물려줄 때가 되니 비로소 해방감을 느끼는 그녀다. 그간 여인으로서 버텨오며 비참하고, 슬프고, 의지할 곳 없이 얼마나 외로웠을지... 이제야 그녀를 이해할 수 있다. 삶의 끈을 놓아버리고 싶었을 텐데 꿋꿋이 견뎌주어 감사하다. 살아주어 감사하다. 그녀가 있었기에 어린 서희가 더 굳세어지고 가문을 이을 준비가 된 것 같다. 앞으로 책 내용이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할 수 없지만 지금 여기까지, 이렇게나마 윤씨부인을 이해하게 되어 내 마음이 편안해졌다.
번외로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다른 한 사람이 또 있다. 바로 용이다. 처음 강청댁(용이 부인)이 등장했을 때 그녀를 묘사한 문장이 잊히지가 않는다.
잘난 남자를 지아비로 삼은 강청댁은 불행할 수밖에 없는 여자였다.
지팔지꼰(지 팔자 지가 꼰다)? 강청댁이 강짜(질투심)가 심한 탓에 의부증으로 불행을 자초하는 팔자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나는 그 '잘난 남자' 용이를 가정 파탄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싶다. 와이프가 있는데도 첫사랑 월선이를 못 잊고 살더니, 3권에서 뜬금없이 임이네와 불륜을 저지르고 만다. 심지어 임이네는 임신까지 하고... 여기서 불륜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건 분명히 용이였다. 착한 남자 콤플렉스인지, 임이네가 불쌍해서 먹을 것을 가져다주다가 결국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버린 것이다. 강청댁은 무슨 죄냐고! 이제 월선이도 돌아왔기에 막장 사각 관계가 어떻게 전개될지 지켜봐야겠지만, 용이가 등장하면 속이 터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래도 참고 그를 이해해보려 한다. 불쌍한 강청댁은 어떻게 될지 걱정이다. 강청댁은 나에게 있어서 아픈 손가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