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의 창 (2008. 04 )
‘너였구나, 새벽잠을 설치고 댓바람에 운동화를 구겨 신게 만든 이가...’
산책길에서 연둣빛으로 올라오는 보리를 만났다.
누렇게 바랜 덤불을 제치고 일어선 싹에서 풋내가 올라왔다.
비릿한 아기 젖내 같은 냄새에 잠시 몽롱해진다.
이맘때였나. 친구들과 근교에 소풍을 갔었다.
유난히 그 날이 설렌 것은 낯선 남학생들과 동행했기 때문이었다.
수줍어서 시선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먼데만 바라보았다.
점심 무렵, 돌담 아래 모여 도시락을 나눠 먹고 누군가의 진행으로 한 명씩 노래를 불렀다.
순번이 다 돌고 그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던 남학생이 마지못해 일어났다.
손발을 덜덜 떠는 모습이 금방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안쓰러운 마음에 말리려고 할 때, 그가 눈을 감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
옛 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면 고운 노래 귓가에 들려 오온다
돌아보면 아무도 뵈이지 않고 저녁 늘 빈 하늘만 눈에 차누나
옛 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면 고운 노래 귓가에 들려 오온다
돌아보면 아무도 뵈이지 않고 저녁 놀 빈 하늘만 눈에 차누나'
앞서 부른 누구처럼 기타 반주를 곁들인 포크송이나 세련된 팝송이 아니었다.
예전 수업시간에 부르고 지난 노래를 아이는 선풍기 날개처럼 떨리는 목소리로 2절까지 불렀다.
뒤에서 키득키득 소리죽여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 웃음의 의미를 짐작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내 귀에는 푸른 파도 일렁이는 보리밭을 등지고 서서 부르는
아이의 ‘보리밭’이 더 없이 청아하고 순수하게 들렸다.
지금도 다른 이들의 노래는 기억나지 않는데,
아이의 보리밭은 봄이 되면 내게 돌아온다.
기교가 빼어나지도 가창력이 특출하지도 않은 아이의 서툰 음성이
푸른 보리 물결을 타고 다가온다.
첫 봄날의 노래, 나의 첫 사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