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풍선이 알려주는 개학의 신호
기념일에 진심인 미국인들에게도 특별한 기념일이 없는 달이 있다. 바로 8월.
휴가와 방학으로 이미 달력이 꽉 차서 굳이 기념일이 없어도 충분히 특별한 달인지도 모르겠다. 하필 기념일에 대해 쓰기로 했는데 첫 달이 유일하게 기념일이 없는 8월이라니. 하지만 글감은 마트 한 바퀴만 돌아도 나온다.
달마다 기념일에 따라 온갖 풍선과 장식으로 화려하게 변신하는 마트에 가보면, 지금이 뭘 준비해야 할 때인지 단번에 알 수 있다. 8월 초, 마트 천장에는 빨간 사과, 노란 연필, 검은색 컴포지션 노트 모양의 헬륨 풍선이 둥둥 떠오른다. ‘Back to School’ 시즌 개막이다.
학부모 앱에는 학년별 준비물 리스트가 공지된다. 흥미로운 점은 물품의 브랜드와 개수까지 지정되어 있다는 점.
“연필 2다스(24개)는 Ticonderoga, 크레파스는 Crayola 24색, 풀은 Elmer’s 12개, 마커는 EXPO 1박스.”
‘Preferred’라고 완곡하게 쓰는 경우도 있지만, 아예 브랜드를 콕 집어 적어두기도 하고 실제로 마트에 가면 리스트 그대로 진열돼 있는 것도 신기하다. 예쁜 학용품 비교하며 고르는 재미는 덜하지만, 학부모 입장에서는 ‘딱잘알 센스’. 정해진 것만 사면 되니 단순하고 편리하다.
풍선 장식은 더 흥미롭다. 노란 연필은 미국인 최애 Ticonderoga라는 걸 알겠는데, 왜 사과일까? 찾아보니 19세기 농촌 아이들이 학비 대신 사과나 감자를 선생님께 드리던 풍습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그중 사과가 흔하면서도 상징성이 강해 ‘사과=선생님’이라는 이미지가 굳어졌다. 지금도 교사 감사 카드, 교실 장식, 심지어 머리핀에도 빨간 사과가 빠지지 않는다. 결국 마트 천장의 사과 풍선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학교와 선생님에게 돌아갈 때가 됐다”는 오래된 신호였다. 정성껏 고른 사과를 수줍게 선생님 책상 위에 올려두는 어린이들의 모습이 상상하고나니 풍선이 더 예뻐 보였다.
우리나라에는 그런 상징이 있을까? 굳이 꼽자면 카네이션이겠지만, 그마저도 어버이날 부모님과 나눠 갖는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라는 노랫말처럼 하늘 같던 교권은 추락하고 있다고 하고, 김영란법 시행 이후엔 커피 한 잔으로도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어려워졌다. 그래서 오히려 ‘사과 풍선’ 같은 작은 상징이 현재까지 이어지는게 더 의미 있게 다가왔다.
개학 2주 전, 드디어 새 학년 반 배정 결과가 발표됐다. 친한 친구 다섯 명 중 한 명도 같은 반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첫째 Z는 한동안 시무룩했지만, 이내 친구들과 속상한 마음을 달래고 새 학기를 준비(?)하는 ‘Back to School Pool Party’를 기획하며 신이 났다. 미국에서는 방학 동안 아이들의 다음 학년 앞에 ‘rising’이라는 표현을 붙이는데, 어쩌면 몇 학년이라고 부르기 애매한 시기를 위한 표현일 뿐일지도 모르지만 내게는 ‘떠오르는, 성장하는’ 아이들을 표현하는 것처럼 긍정적인 뉘앙스를 주어 그 표현을 좋아한다.
개학 1주일 전, 각각 다른 반으로 흩어진 rising 5th grader 다섯 명은 새 학년을 기다리며 학용품을 꼼꼼히 준비하고, 풀장에서 신나게 소리 지르며 다가오는 새 학기를, ‘Back to School’의 시절을 즐겁게 기념했다.
길고 긴 여름방학도 이제 끝나간다. 바다와 산, 수영장과 사람들로 채운 시간들. 더운 날씨만큼 느슨하게 지내던 여름의 크고 작은 의식들이 이제는 새 학기를 앞둔 긴장감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그렇게 시간을 구분하고 감사하며 지낸 덕분에, 일상의 순간들이 더 매력적이고, 우리의 인생은 더 깊게 음미되는 것 같다.
가을아, 새 학기야, 어서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