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지 Sep 27. 2024

내 인생나무에 대하여

Ginkgo biloba. L.

때는 작년 이맘때즈음 조경에 꽂혀 나무 학명을 외우려 애쓰던 어느 날.


라틴어로 만들어진 학명은 스펠링도 어렵고 쉬이 외워지지 않기에 말도 안 되는 어거지 주문을 만들어서 반복하곤 했다.


‘은행에서 돈 빌려봐 - Ginkgo biloba. L. - 징코 빌로바는 은행나무..., 은행나무는 암수딴그루 낙엽 교목으로 지질학상 고생대 페름기부터 자랐고, 1문 1강 1목 1속 1종만이 현존하는 생물로서.. 음..? 그랬었어? 나만 몰랐나?’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철마다 날씨 예보를 확인 후 날 좋은 평일에 연차를 쓰고 운곡서원*에 은행나무를 보러 (그리고 운곡다원에서 국화차 마시고, 약과 먹으러) 다녀오는 사람이다. 또한 환절기에는 어김없이 잔기침을 앓고, 엄마가 볶아주시는 은행 7-8알을 며칠 먹고 나면 금방 낫던 사람이다. 그리고 갑자기 조경의 모든 것이 궁금해져 조경기사 자격 도전자가 됐다. 조금 더 은행나무에 대해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행나무에 대해 디깅을 시작하면서 내가 가장 반해버린 부분은 이 나무는 2억 7천만 년 전의 화석으로도, 2024년 현재 우리 동네 가로수로 발견(!)되는 ‘살아있는 화석’과 같은 나무라는 사실이었다. 수억 년 동안 1속 1종으로 종을 보존해 오며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지구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었다. 고생대 페름기에 당시 살아가던 생물종 96%가 대멸종한 극한의 시기를 버티고 꿋꿋하게 현대까지 살아남은 근성 있는 나무, 은행나무.     


얼마나 생명력이 좋은지 하나의 나무가 1천 년 이상 생존할 수 있고, 배기가스 가득한 도심의 열악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며 심지어 화재에 대해서도 강한 저항력이 있어 가로수로 사랑받는 단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운곡서원에 가서 380년 된 보호수 은행나무를 안던 기분을 눈을 감고 떠올려본다.

두 손을 가득 펼쳐도 다 안을 수 없고 거칠거칠하면서도 은근한 수분이 손바닥과 손가락 끝에 느껴지던 그 생명력이 깃든 나무를 안고나면 언제나 기분이 개운하고 바닥을 보이던 기운이 충전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는데, 분명 내가 안았는데, 나를 위로하고 안아주는 것 같은 그 친구 같은 나무가 고맙고, 귀하고 그랬다. 때마다 초록, 연노랑, 황금, 흰색.. 다른 빛, 다른 색으로 흔들리면서 내 흔들리는 마음을 달래주던 그 은행나무가 참 좋았다.

     

항상 곁에 있어 특별해 보이지 않던 가로수, 은행나무가.. 심지어 가을 철엔 지뢰취급을 받는 은행나무가 그렇게 내게 인생나무가 되었다.      


Copyright ⓒ 2018 yangji All rights reserved.


내 곁에 소중한 사람들의 얼굴과 길고 두툼한 팔을 떠올려본다. 나의 인생나무, 은행나무를 닮은 조금 주름지고 거칠거칠한 사람들이다. 화려하지도, 희귀하지도 않지만 공룡도 살아남지 못할 시대에서 살아남은 은행나무 같이 생존력이 강한 사람들. 자신들도 이렇게 힘든 시대를 살아내느라 바쁘고 힘들 텐데, 기꺼이 팔을 뻗어 나를 안아주고 힘을 주는 사람들. 고마운 사람들.   



             

현재 은행나무는 멸종위기종**으로 분류된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은행나무 종자***, 우리가 먹는 그 은행을 먹고 퍼트려주던 동물들은 과거에 멸종되었고, 현재는 야생 환경에서 자생하는 은행나무 군락을 거의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은행나무의 거의 유일한 매개동물은 인간뿐이고, 만약 인류가 멸종하면 은행나무도 함께 멸종될 것이다.     


사람이 없다면 은행나무뿐 아니라 사람들도 결국 멸종할 것이다. 빠르고 차가운 시대, 계산이 편하고 너그러움과 다정함이 낯선 지금 시대는 날로 발전하는 의료기술덕에 인류의 물리적인 멸종은 멀어진 것 같지만 심리적인 멸종은 가까워지는 듯하다.


우리 곁의 흔하고, 흔하지 않은- 은행나무 같은 사람들을 잃지 않도록 내가 먼저 손을 뻗어 야겠다. 우리 아이들도 품이 넓고 따뜻한 사람으로 커갈 수 있도록 기도하고 도와야지. 그렇게 나 먼저 지구상 인류의 멸종을 막아보자. 그래야 은행나무도 산다.  


* 운곡서원은 경북 경주시 강동면 사라길 79-13에 위치하는 조선시대 서원이다.

** 은행나무는 멸종위기종(Endangered species) 내 위급종, 위기종, 취약종 중 '장기적으로 멸종할 위험이 있는 종'으로 구분되는 취약종(Vulnerable)에 해당한다. (국제자연보전연맹(IUCN) 분류기준)

*** 은행나무는 겉씨식물이므로 우리가 아는 은행 열매는 사실 열매라기보다는 종자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