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관리규정 제67조(희망퇴직)에 따라 원에 의하여 그 직을 면함.
2018년 3월 31일 마지막 인사 발령문을 받았다.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대체로 좋은 기분이었다. 충분히 자신 있었다.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는 세상이 만만했다.
11년간 네 번의 팀을 옮기며 조직에서 할 수 있는 경험은 다 했다. 더 큰 성장을 갈망하던 나에게는 두 개의 선택지가 있었다. 승진, 조직 밖에서의 완전히 새로운 삶. 마지막 인사 발령을 받았던 그해는 승진 연차였다. 점수는 충분했다.
2018년 인사 발령문에 승진자가 아닌 퇴직자에 이름을 올리는 것을 선택했다. (퇴사 의사를 밝혔을 때 나에게 괜히 높은 점수를 줬다고 팀장이 말했다. 그 팀장은 이후 상무까지 승진한다.) 내가 꿈꾸는 성장을 조직 안에서가 아닌 새로운 인생에서 이루고 싶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시스템을 따라가기에 벅찼던 시기를 지나고 나니, 맹목적으로 쫓았던 회사의 비전이 내가 알고 있던 것과 달라지기 시작했다. 명함에 박힌 회사명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한 것도 이쯤이었다. 그때부터 일이 재미없어지기 시작했다.
퇴사하면서 300페이지의 업무 메뉴얼을 만들어 후임자에게 인계했다. 내 성격이다. 진심으로 후임자와 회사의 편의를 위해서였는지, 절대 나를 찾지 말라는 의미였는지 확실하진 않다. 분명한 건 즉흥적인 생각으로 퇴사를 한 건 아니었다는 거. 300페이지의 매뉴얼을 만든 것처럼 꼼꼼하고 정확하게 생각했다.
효리네 민박과 리틀 포레스트가 내가 살고 있는 현실에 의문을 품게 했다. 이효리님와 이상순님, 그리고 민박집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분명 느리게 움직이는데 항상 행복한 표정이었다. 시골로 내려간 김태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밀도 있는 삶이 전부라고 생각하던 내 가치관이 흔들렸고,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나를 지탱하던 무언가가 사라진 느낌이었다. 이때부터 급속도로 지쳐갔다.
더욱 성장하고 싶었다.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조용히 하루가 지나가길 바라는 게 아닌 내 능력으로 이로운 일을 하고, 인정받고, 돈을 더 받고 싶었다. 조직에선 불가능했다. 내가 가장 큰 희열을 맛봤던 순간은 정말 어려운 일을 정말 정말 어렵게 해결했을 때, 내 프로젝트 기획이 성공적인 결과가 나왔을 때, 그리고 충분한 보상이 돌아올 때였다. 작년 문서에서 날짜만 바꿀 때 가장 빨리 결재가 되는 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인생에서 선배는 잘 만나야 했다. 학부 시절 어느 과목 강의 시간에 교수님을 대신해서 여자 선배가 자신의 커리어를 들려줬다. 공부할 때 이야기, 취업에 성공할 때 이야기, 지금 자리에 올라가기까지의 대서사 중에 가장 기억에 남았던 건 1억 연봉이었다. 1억 연봉을 받고 팀장의 자리에 있는 선배가 엄청난 성공을 이룬 사람처럼 느껴졌다. 1억 연봉이 찍힌 급여 내역서를 보고 왠지 모를 허탈감에 빠진 건 선배 덕분이었다. 선배는 나에게 귀인인지 아닌지 궁금하다.
내가 퇴사한 이유는 복합적이었다. 퇴사 후 만나는 사람에 따라 그만둔 이유의 비중을 조금씩 다르게 말했다. 누구에게는 너무 지쳐서, 누구에게는 조직이 싫어서, 누구에게는 돈을 더 벌고 싶어서, 누구에게는 더 재밌게 살고 싶어서, 퇴사 후 나를 쫓는 퇴사에 대한 소문만큼이나 다른 이유를 댔다. 나의 퇴사는 그렇게 미스테리한 일이 아닌데 소문은 미스테리했다. 로또가 당첨됐다. 처가의 사업을 물려받는다. 코인이 대박 났다. 암에 걸렸다. 대체로 정말 그랬으면 싶은 소문이었다. 암 투병만 빼면. 그만큼 비교적 젊은 나이에 이 회사, 아니 그 회사를 떠나는 일은 그 조직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신기한 일이었나보다.
물론 미래에 대해 고민은 하고 나왔다. 금융회사 출신인 것이 무색하게 짜임새 있는 계획을 세우지는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다. (세상에 만만했던 시절엔 완벽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앞으로 행복한 순간에 있는 사람을 만나는 일을 할 것이라는 계획을 안고 퇴사를 했다.
행복한 순간에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일을 찾아, 그중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남겼다. 웨딩업과 여행업, 2개의 사업이 남았다. 퇴사를 마음먹었던 시점, 2017년 여름쯤 고등학교 친구와 자주 연락했다. 그 친구는 여행업에 몸담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내 미래는 ‘여행으로 돈을 버는 일’로 향하고 있었다.
* 안녕하세요. ‘제주를 가정 완벽히 경험하는 여행, 가이드오’를 운영하는 양주형입니다. 이 매거진은 현재 진행 중인 로컬 스타트업 가이드오의 이야기를 담을 예정입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가이드오의 여정에 함께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