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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가이드 Jun 07. 2023

제주에서 가장 상징적인 역사적 건물

제주 관덕정

보물 제322호, 제주에서 가장 상징적인 역사적 건물 관덕정. 관덕정은 제주 도민에게는 보물 제322호의 의미를 넘어 일상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건물이다. 누구나 이곳을 거쳐 갔으며, 이곳에 대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단순히 오래된 옛 건축물이라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이 녹아 있기에 관덕정은 제주에서 가장 상징적인 역사적 건물이다.


관덕정은 1448년(세종 30년)에 창건되어 총 11번 중수(보수) 끝에 지금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 제주성 안 전각 중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유일한 문화재이다. 관덕정은 본래 군사시설의 목적으로 지어졌다. 1530년(중종 25)에 편찬한 관찬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관덕정에 관한 기록으로 신석조(조선 전기 문신)의 기문이 “제주 관아 남쪽에 병사들이 훈련하는 활터가 있었지만, 추위와 더위를 피할 곳이 없었다. 그런 상황을 안타까워하던 신숙청이(안무사로 부임) 3칸 건물을 지었는데 그 모습이 장관이었다.”라고 전해진다.



정면에서 바라본 관덕정



관덕정은 전통 한식 가옥의 지붕 구조의 하나인 단층 팔작지붕, 앞면 5칸, 옆면 4칸의 130여 제곱미터(40여평)에 이르는 제법 당당한 전통 건축물이다. 관덕정 정면에서 이 건축물을 바라보면 가장 먼저 중앙에 걸려 있는 편액이 눈에 들어온다. 장중한 해서체로 바르고 묵직하게 느껴지는 이 글씨는 ‘활을 쏘며 높은 덕을 본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유학 오경의 하나인 ‘예기’의 사의편에 ‘활쏘기란 진퇴와 주선이 반드시 예에 맞아야 한다. 마음이 바르고 자세가 곧아야 활과 화살을 잡을 때 안정되고 든든하며, 이런 다음에야 과녁을 맞힐 수 있다. 이것으로써 덕행을 보는 것이다.’라는 사자소이관성덕야(射者所以 觀盛德也)에서 따온 이름이다. 이 글씨는 본래 조선의 명필 안평대군의 글씨였으나, 화재로 소실되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아계 이산해의 글씨라고 전해지고 있다. 안평대군의 글씨가 이산해의 글씨로 바뀌었다는 주장은 김상헌(조선 중기의 문신)의 ‘남사록’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기행문 형식의 남사록에서 김상헌은 ‘비해당(匪懈堂 안평대군의 당호)의 액자는 화재로 없어지고 지금 걸려 있는 것은 아계의 필적이다.’라는 글을 남겼다. 이 남사록의 한 구절로 관덕정 현판의 주인은 바뀌게 되었는데, 그렇다면 과연 이 글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안평대군의 액자가 불에 탔다고 기록했지만, 사실 관덕정은 1448년 창건된 이래 지금까지 화재가 발생한 사실이 없다. 그렇다고 그 당시 이 현판만 불에 태웠다는 사실도 근거가 미약하다. 또한 1602년 세상에 나온 남사록 이후에도 이 현판을 언급한 학자(이원진의 ‘탐라지’외 이형상, 김석익, 이응호, 김문희, 김범준 등의 역사나 지지 등)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여전히 안평대군의 글씨로 기록하고 있다. 만약 안평대군의 액자가 소실되고 대신 이산해의 액자로 개편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면 한 마디쯤 언급할 만한 일이다. 남사록은 청음 김상헌이 제주에서 반란 음모 사건이 발생하여 어사로서 역할을 하기 위해 4개월 동안 제주에 머무는 동안 자신이 보고, 들었던 이야기를 기행문 형식으로 집필한 것이다. 검증을 거칠 필요가 없는 글의 형식으로 오류가 없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정확한 사실은 여전히 확인할 수 없지만 결국 어떤 기록 한 구절에 따라 검증도 없이 안평대군의 글씨에서 이산해의 글씨로 바뀐 것은 좀 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해 보인다.



관덕정 편액



관덕정이라는 이름은 고유명사가 아닌 보통명사에 가깝다. 이미 고려 시대에 이 명칭이 존재했으며, 조선 시대에는 ‘관덕정’이라는 이름을 가진 전각이 수도 한양을 비롯해 다양한 지역에 존재하고 있었다. 현재는 이곳을 포함해 창경궁, 대구 서구 대명동과 전라북도 남원 등에도 있어 이곳의 명칭이 ‘제주 관덕정’으로 바뀌게 된다.



관덕정 내부



관덕정은 가까이 접근할 수 있어 옛 건물의 내부를 감상할 좋은 기회이다. 관덕정을 가까이에서 보면 주위 4면이 모두 트여 있는 구조를 확인할 수 있다. 내부는 28개의 크고 작은 원기둥(외진주 18본, 내진주 8본, 내진 평주 2본)으로 기와지붕을 받쳐 있고, 화려한 색과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다. 옛 건물에 여러 가지 색으로 무늬를 그려 아름답고, 장엄하게 장식하는 것을 단청이라고 하는데, 궁궐, 관아, 사찰과 같은 목조 건물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오행설에 근거하여 오방색인 청색, 적색, 황색, 백색, 흑색을 기본으로 일정한 규칙에 따라 문양을 그려 넣는다. 단청의 목적은 건물을 돋보이게 해 권위를 살리기 위해, 그리고 목조 건축물을 벌레가 먹거나 썩지 않게 하게 하려고, 나무의 균열을 감추고 건축의 결함을 가리기 위함 등 다양한 목적이 있다. 우리나라의 단청 조형 양식은 건물의 각 부재에 장엄되는 문양의 밀도에 따라 구분되는데 크게 가칠단청, 긋기단청, 모로단청, 금단청으로 나눌 수 있다. 그 건물의 품격이 높고 낮음에 따라 상응하는 조형 양식으로 단청이 시공되는데 관덕정은 궁궐단청에 준하는 모로단청이 사용됐다. 조선은 유교를 국교로 삼았기 때문에 물질보다 정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유교적 이념에 따라 궁궐의 단청은 가장 화려한 금단청 양식이 아닌 모로 형식으로 행해졌다. 모로는 모서리 또는 끝이라는 의미가 있으며, 끝수평 부재의 양단부에 직휘를 두고, 머리초 문양을 채색하고 휘를 두르고 중간 계풍에는 옥색(뇌록)으로 가칠을 하고 먹분선으로 장획긋기를 하는 단청이다.



관덕정 내부 모로 단청



관덕정 내부 모로 단청



요즘은 건축물도 예술의 일부로 받아들여지기도 하는데, 건축이 다른 예술과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점은 건축은 근본적인 자연법칙인 ‘중력’을 이겨내려는 인간의 노력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특히 옛 건축물은 중력을 어떻게 이겨내고 있는지를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에 우리에게 더욱 감동을 준다. 이곳 관덕정도 그 옛날, 무거운 기와지붕을 몇 개의 기둥을 어떻게 배치하고, 보를 어떻게 연결하면서 중력을 어떻게 이겨내고 있는지 직접 확인할 수 있어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관덕정은 군사 시설의 목적으로 지어져 활쏘기와 관련된 이름이 붙여지고, 실제로 이 앞마당에서 활쏘기를 비롯한 군사 훈련을 한 사실이 있지만, 이곳에 대한 기록과 구조적 특징을 보면 단순한 군사 시설이었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 관덕정의 개방적인 모습은 폐쇄적이어야 할 군사시설에 어울리지 않는 형태를 보인다. 오히려 누(塿)와 정(亭)을 통칭하는 누정 건축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조용하거나 경치가 좋은 곳에 지어지는 누정 건축과 달리 관덕정은 제주읍성의 가장 중심이 되는 공간에 배치되었는데, 이러한 입지적 특성은 관덕정의 건축에도 반영되어 일반적인 정자나 누각과는 다른 형태적 특징을 갖게 된다. 내륙의 누정 건축에서는 대부분 일부 공간에 온돌을 구성하여 사적이고, 정적인 형태로 구성하는 것에 비하여 관덕정은 오히려 전면 한 칸에 박석을 까는 등 공적이고 동적인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모습은 관영 건축의 누정에서 사례를 찾아볼 수 없는데, 이렇듯 제주 관덕정은 군사 시설의 기능뿐 아니라 목사의 중요한 집무처로 기능을 수행하도록 건립된 독특한 성격을 보여주는 건물이다.



관덕정 내부에서 바라본 광장



관덕정과 광장



이런 특성이 있는 관덕정은 건물 앞 넓은 광장 공간과 함께 더욱 특별한 역할을 하게 된다. 제주 목사의 집무처인 연희각이 별도로 있었음에도 이곳 관덕정과 광장에서는 목사의 집무와 많은 관아 행사가 열리게 된다. ‘관덕정에서 군대 사열과 연회의 잔치 같은 모임을 모두 여기서 하였다.’라는 기록에서도 조선시대 관덕정의 성격을 알 수 있다. 1702년에 그려진 탐라순력도를 보면 관덕정에서는 공마 진상과 군사 훈련, 연회 등을 위한 관청 중심의 기능을 하는 공간이었다는 사실을 정확히 확인할 수 있다. 관이 주관하는 행사로 사람이 모였던 관덕정 광장은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시민의 참여와 접근성이 높아지는 시민 광장으로서의 성격을 갖게 된다. 제주 최초의 오일장이 이곳에서 열렸고, 제주지역 최초 민란인 이재수의 난이 이곳에서 발생하였다. 또한 제주사의 가장 큰 사건인 제주 4.3의 도화선이 되는 장소이기도 했다. 입춘굿놀이, 탐라문화제 등 시민 중심의 문화와 축제의 공간으로 사용되기도 했고,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 약속의 장소이기도 했다. 제주도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였던 곳이 관덕정 앞 광장이었다. 그래서 제주 도민은 누구나 관덕정 광장의 추억을 하나씩 갖고 있다.



여전히 다양한 행사가 펼쳐지는 관덕정 광장



도시에서 광장의 기능은 아주 중요하다. 광장이 있다는 것은 사람이 모일 수 있다는 것이고, 사람이 모이면 문화가 형성되고, 그곳의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결국 도시와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연결하고 생명력을 유지하게 하는 수단이다. 지금은 관덕정 광장 위로 도로가 생기고 건물이 들어서면서 그 면적이 쪼그라들어 구조적으로 광장의 기능을 많이 잃어버렸다. 그렇다고 광장 문화가 아직 사라진 건 아니다. 광장은 인위적으로 만들거나 없앨 수 있지만 광장 문화는 강제로 만들거나 없앨 수 없다. 지금은 예전의 활기를 찾아보기 어렵지만 오랜 시간 워낙 많은 이야기가 쌓여 있기에 조금의 계기만 있으면 예전 광장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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