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는 이름에 靈(신령 영)이 들어간 대표적인 장소가 있습니다. 한라산 영실과 물영아리. 제주 여행을 해봤다 하는 여행자에게는 이미 익숙한 이름이죠. 이 두 곳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숲과 물, 그리고 물을 휘감아 도는 안개가 수시로 피어오르는 모습인데요. 상상만 해도 신령스러운 풍경입니다. 몽환적인 이곳의 장면은 선조들에게도 감동을 주었나 봅니다. 신령의 계곡, 물의 신령이라는 멋진 이름을 붙여줬으니 말입니다.
한라산 영실이 부담스럽다면 조금은 쉽게 신령을 만날 수 있는 곳은 물영아리입니다. 물론 천국인지 지옥인지 어디로 연결됐는지 모를 엄청난 계단을 오르긴 해야 하지만 말입니다. (물영아리에는 습지까지 가는 코스는 빠르지만, 가파른 계단과 비교적 완만한 코스가 있습니다. 이 기행문은 가파른 계단으로 올랐던 경험입니다.) 하늘 높이 솟은 삼나무를 배경으로 둔 초원 위에서 여유롭게 풀을 뜯는 소를 먼저 만나게 된다면 천국 또는 지옥, 어디로 향하는지 모를 계단도 낭만적으로 받아들일 여유가 생기게 됩니다.
끝 모를 계단을 오르다 시끄럽고 괴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면 목적지가 지척에 있다는 뜻입니다. 이 지점에서는 소리의 정체가 궁금해 분명 발걸음이 가볍고 빨라질 겁니다. 오르막 계단이 끝나고 내리막이 시작되면 이제 분화구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입니다.
소리는 점점 더 커집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소리는 커지지만, 적막함도 함께 커집니다. 온전히 내 공간, 내 시간이 완성되는 순간입니다. 소리의 정체는 물속에 숨은 맹꽁이인 것 같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있는지 가늠이 안 될 정도로 합창을 해댑니다. 맹꽁이의 노랫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이 공간을 한동안 사유해 봅니다.
물영아리는 오름입니다. 화산 활동으로 인해 분석(Scoria)이라는 작은 화산 쇄설물이 쌓여 산의 형태를 만든 화산체입니다. 오름의 중심에는 화산이 폭발해 용암이 분출했던 분화구가 있고, 분화구에 물이 고여 신비로운 습지를 만들었습니다.
습지는 지구상에서 생명이 가장 풍부하게 존재하는 지역입니다. 물영아리 습지는 독특한 수문 환경을 갖고 있습니다. 장마철과 같이 비가 많이 오는 시기에는 둘레 300m, 깊이 40m의 산정 화구호로 존재하다가 건조기가 되면 습지로 변하게 됩니다.
외부에서 유입되는 지하수나 하천 없이 빗물로만 만들어진 물영아리 습지에는 멸종위기 야생생물인 긴꼬리딱새, 비바리뱀, 물장군 등이 있어 분화구 내 습지의 육지화 과정, 생태계 물질 순환 등을 연구할 수 있는 학술 가치도 매우 높은 지역입니다. 이에 2000년 전국에서 최초로 습지 보전법에 따른 습지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으며, 2006년 람사르습지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습니다.
*람사르습지: '물새 서식지로서 특히 국제적으로 중요한 습지에 관한 협약' (The Convention on Wetlands of International Importance Especially as Waterfowl Habitat)에 의해 지정, 보호되는 습지입니다. 1971년 2월 2일 이란의 람사르(Ramsar)에서 채택되었고, 물새 서식 습지대를 국제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1975년 12월에 발효되었다. 우리나라는 1997년 7월 28일 101번째로 람사르 협약에 가입하였고, 현재 우리나라에는 24개의 습지가 람사르 습지로 등록되었는데, 제주에만 5개의 습지가 지정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