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가스는 죄가 없는데
아직도 그날이 생생하다. 우리가 돈가스와 쭈꾸미를 놓고 살벌하게 싸웠던 날.
그날은 우리의 400일이었다.
시험공부로 밤을 새운 채로 시험까지 치른 나는 당장 집으로 달려가서 잠들...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우리의 기념일이었으니까. 반면 D는 다음 날까지 시험이 있어 학교 열람실에 남아 공부를 해야 했다. 나는 저녁이라도 같이 먹으며 축하하고 싶어서 그의 옆에 앉아 몇 시간 동안 불편한 잠을 잤다. 400일이 뭐 대수냐고, 그냥 n주년 기념일이나 챙기란 사람들도 있겠지만 내겐 모든 기념일이 소중했다. 400일은 단 한 번뿐인걸? 2주년은 안 올지도 모르고.
D의 공부가 어느 정도 마무리됐을 때, 우리는 가까운 카페에 가서 커피와 함께 조각 케이크를 시켰다. 근사한 파티는 못 하지만 조각 케이크라도 먹어줘야 기분이 나지. 나한테 기념일은 그런 거였다. 소소하게라도 꼭 챙기고 넘어가야 하는 날. 그때까지는 꽤 좋았다. 그러니까 식당가로 이동하면서 저녁 식사 메뉴를 정하기 전까지는.
"나 쭈꾸미 먹고 싶어."
"얼마 전에도 먹었잖아."
"그래도 또 먹고 싶어. 오늘 시험 봐서 너무 스트레스받았어."
"나는 돈가스 먹고 싶은데? 오늘은 돈가스 먹자."
"나 지금까지 기다렸잖아. 쭈꾸미 먹자."
"나는 오늘 돈가스 먹고 싶어. 아니면 쭈꾸미 먹을 테니까 네가 사."
"뭐라고?"
잠을 제대로 못 자서 마음의 그릇이 한껏 작아져 있던 나는 한순간에 폭발하고 말았다. 내가 튀김류 별로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 돈가스 먹자는 것도 짜증 나는데, 네가 먹고 싶은 거 먹을 테니까 네가 계산하라고? 심지어 오늘은 기념일이잖아. 오늘만큼은 내 기분 좀 맞춰주면 안 되는 거야? 난 일찌감치 시험도 끝났는데 누구 때문에 이 시간까지 집도 못 가고 기다렸는데? 아니 근데 커피랑 케이크도 내가 사고, 저녁도 내가 사야 해? 따져 묻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굳이 쏘아붙이지 않았다. 대신 더 속 좁은 짓을 했다. 그를 (살벌하게) 흘겨보고는 돈가스집으로 쿵쿵대며 들어갔다. 그리곤 다 먹을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D도 굳이 내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밥 먹는데 이렇게 눈치 보게 해야겠냐며 맞불을 놨을 뿐. 그렇게 우리는 최악의 기념일을 보냈다.
싸움은 장기전으로 이어지지 않았고 다행히 금세 화해했지만 난 그날 이후로 돈가스가 정말 싫어졌다. 그때 먹었던 돈가스가 맛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 식당은 우리 학교 학생들에게 인기 만점이었을 정도로 맛집이었는데, 잔뜩 화가 나서는 꾸역꾸역 욱여넣었으니 맛있었을 리가 없지. 하지만 대수롭지 않았다. 세상에 맛있는 음식이 얼마나 많은데, 돈가스 하나 안 먹는다고 무슨 문제라도 생기겠어?
생겼다. 그것도 엄청 자주. 사람들끼리 모여 식사 메뉴를 정하면 꼭 '돈가스'가 언급됐다. 나는 자연스럽게 다른 메뉴를 제안하거나, 오늘은 돈가스가 안 땡긴다고 돌려 말하며 피하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내 생각보다 훨씬 돈가스를 좋아했다. 먹기 좋게 잘라 한입에 넣을 수 있어 편한 음식이라서 그런가? 아니면 진짜 그 정도로 맛있나? 그래 봤자 고기에 튀김옷 입힌 거지 뭐. (그 후에 알게 된 건데, 여자들의 소울 푸드가 떡볶이라면 남자들의 소울 푸드는 돈가스란다. 이마짚...)
그때마다 D가 생각났다. 헤어진 지가 언젠데 아직도 돈가스 때문에 걔 생각이 나다니. 엄밀히 말하면 D와 싸웠던 그날이 자꾸 떠올랐다. 그날 일만 아니었어도 돈가스 때문에 이렇게 불편할 일은 없었을 텐데. 괜히 기분이 나빠졌다.
그런데 얼마 전, 부산에서 서울까지 나를 보러 와 준 친구가 하필이면 돈가스를 먹자는 게 아닌가. 멀리서 온 친구였기에 거절하지 못하고 가까운 돈가스 집으로 향했다. 메뉴도 돈가스밖에 없는 식당이라 다른 메뉴를 고를 수도 없었다. 먹는 시늉만 해야지 했는데 남김없이 먹었다. 그 식당이 정말 맛집이었던 건지,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웃으며 먹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맛있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날도 그냥 이렇게 맛있게 먹어줄 걸. 같이 기분 좋게 저녁 먹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잖아.'
그러고 보니 난 서운한 일이 생기면 거기에 지나치게 파고드는 편이었다. 스스로 상처를 키우기 딱 좋다. 그 덕에 헤어진 지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 돈가스 때문에 D를, 그날을 떠올리고 있었네. (좋았던 기억도 아니고, 전 애인과 싸웠던 날을 자꾸 떠올리는 건 썩 유쾌하지 않다.) 도대체 작가님은 <일단 오늘은 나한테 잘합시다>라는 책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바늘에 찔리면 바늘에 찔린 만큼만 아파하면 된다고. 왜 내가 바늘에 찔려야 했나, 바늘과 나는 왜 만났을까, 하며 파고들면 사람이 망가진다고. 그 말이 맞다. 그날의 난 D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를 뜯어보면서 서운한 감정을 부풀렸다. 'D는 나를 별로 사랑하지 않는 게 분명해', '나를 이런 취급하다니' 하며 스스로에게 생채기를 남겼다. 그러니 몇 년 동안 돈가스 따위에 마음고생을 하지. 그날 D가 돈가스를 먹고 싶다고 했을 때 '그럴 수도 있지. 그냥 오늘따라 돈가스가 많이 먹고 싶구나' 하고 넘길 걸 그랬다.
그런 의미에서 늦었지만 D에게 전한다.
- D야, 생각해보니까 나도 그날 잘한 거 없더라. 너도 다음 날 시험이라 피곤했을 텐데. 네가 평소에 쭈꾸미도 자주 같이 먹어줬는데 그날은 내가 좀 양보할 걸 그랬어. 미안해. 나 이제 너랑 싸우면서 먹었던 돈가스는 잊고, 너를 미워했던 마음을 반쯤 내 탓으로 돌려서, 그렇게 또 한 걸음 너와 멀어지려고.
글 양유정
그림 소우주 (instagram@sowoojoo_)
잠깐 주목!
(저희 이제 레터로도 보내드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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