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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유정 Jul 16. 2021

그때 날 차단해줘서 고마웠어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찌질했던 그날의 기억

그와 헤어진 건 가을. 내가 다시 그에게 연락한 건 다음 해 여름.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맨날 SNS만 훔쳐보다가 덜컥 메시지를 보냈다.


"잘 지내?"


아, 뻔한 멘트. 내가 봐도 진짜 구리다고 생각하던 중 '읽음' 표시가 떴다. 헉, 핸드폰 하는 중이었나? 이렇게 빨리 읽다니. 그가 답장을 썼다 지웠다 하는지 '…' 표시가 생겼다 사라졌다 했다. 긴장되는 마음을 간신히 가라앉히며 답장을 기다렸다.


"오랜만이네. 그럭저럭 잘 지내. 무슨 일 있어?"


헤어진 지 1년이 다 되어 연락한 나에게 그는 '무슨 일 있냐'고 물었다. 자존심이 세서 절대 먼저 연락할 내가 아닌데, 진짜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싶었던 거겠지. 놀랐을 그가 떠올라서 웃음이 났다. 답장이 와서 다행이라는 안도감도 반쯤 섞인 웃음이었다. '무슨 일 있냐니. 아직도 너무 보고 싶은 게 일이라면 일이지'라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구차한 답장을 보냈다.


"아무리 힘들어도 연락하면 안 되는데, 오늘은 그냥 연락하고 우스워지는 게 나을 것 같더라. 보고 싶어서 연락했어."


정말 그가 비웃었다고 해도 할 말이 없다. 먼저 헤어지자고 한 건 나였으니까. 우리가 헤어지던 날, 그는 내 마음을 돌려놓기 위해 울면서 매달렸다. 그 후로도 수없이 전화를 걸었고, 내가 일하는 곳에 찾아오기도 했고, 주말엔 우리 집 근처 카페에서 하루 종일 나를 기다리기도 했다. 나는 그때마다 매정하게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그는 나를 더 행복하게 해줄 사람이 아니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다시는 내가 보고 싶지 않을 법도 한데, 그는 밥 한 번 먹자는 내 말에 흔쾌히 응해줬고 우리는 일주일 뒤 자주 데이트했던 동네에서 만났다. 저녁은 됐고 술이나 먹자는 그를 따라 조용한 술집에 들어갔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하던 일은 잘 되고 있는지 한참을 얘기했다. 그 시간이 너무 즐거워서 나는 우리가 다시 사귀는 줄 착각하기도 했다. 그의 눈빛에서도 진한 그리움이 묻어났다. 그 눈빛에 용기를 내어 진짜 속마음을 전했다. 다시 해보자고, 그때보다 더 잘할 수 있다고, 헤어진 이후로 단 하루도 후회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고.


정말이었다. 나는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그의 SNS에 들어갔다. 그가 SNS에 의미심장한 노래 가사를 올리면 혹시 내 얘기인가 싶어 괜히 기대했다. 예쁜 카페 사진이라도 올라오는 날엔 누구랑 간 건지, 새 여자친구가 생긴 건 아닌지 불안해졌다. 가만히 내 얘기를 듣던 그가 한참을 말없이 생각이 잠겼다. 그리고 힘들게 입을 뗐다. 솔직히 많이 흔들린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다시 시작할 수는 없을 것 같다고 했다. 여전히 나를 좋아하지만 그때만큼 사랑하지 않는다고, 내 얼굴을 볼 때마다 과거의 상처가 되살아난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서야 실감이 났다. 우린 헤어진 사이고, 헤어진다는 건 다시 만날 수 없다는 뜻이라는 거. 그래도 그가 미웠다.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는 커플들이 얼마나 많은데, 다시 만나면 더 좋을 수도 있는데 그걸 한 번 안 해주나 싶어서. 계속 설득해보려는 나와 달리 그는 점점 더 단호해졌다. 그리고 우는 나를 집 근처까지 바래다주고 돌아갔다.



'그래. 그렇게 싫다는데 별 수 있어? 진짜로 잊자.'라고 생각했지만 도무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참지 못하고 나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내 전화를 거절하고 미안하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목소리를 들으면 더 힘들어질 것 같다고 했다. 며칠 뒤엔 SNS를 비공개로 전환했다. 자꾸 내가 보는 게 부담스러웠나 보다. 더 멀어지는 게 무서워서 그의 집 앞에 찾아갔다. 전화를 걸었지만 몇 번 울리지 않고 끊어지는 신호음. 아예 수신 차단을 한 거다. SNS도 차단 당해 더 이상 메시지를 보낼 수도 없었다. 일, 이, 삼, 사, 오... 그가 사는 아파트 앞에서 그의 방이 어디쯤인지 손으로 세기를 수십 번. 깜깜해지고 막차가 가까워지고 나서야 나는 발을 돌렸다.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맞은 편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을 보는데 우리가 처음 헤어질 때 나를 잡았던 그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이게 뭐야. 나 벌 받는 건가. 끝까지 해보지 않고 바보 같은 이별을 하더니 내게 남은 건 뼈저린 후회였다. 그렇게 후회할 거면서 왜 헤어졌냐고? 우리 둘 다 바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자꾸 서운했지만, 서운한 걸 서운하다고 말하지 못하는 바보였다. 그는 눈치가 없어서, 말해주지 않으면 내가 서운한 줄 모르는 바보였다. 난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찰떡같이 알아줄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그런 사람은 없다는 걸 깨닫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내가 의사소통을 잘했더라면 우리는 헤어지지 않았을 텐데, 내가 서운하다고 하면 그는 달라지기 위해 노력해줄 사람이었는데.


그의 말처럼 우리는 다시 잘해볼 수 없었다는 걸 그를 다 잊어갈 때쯤 깨달았다. 헤어졌다 다시 만나면 모든 게 두 배로 어려우니까. 나는 조금만 서운한 일이 생겨도 '역시 또 서운하게 하네.'라고 생각할 거고, 그는 혹시 내가 서운해하다가 또 헤어지자고 할까 봐 불안해할 거다. 그런 마음으로는 절대 행복한 연애를 할 수 없다. 그러면 나는 또 힘들어하다가 그에게 이별을 말하겠지. 나보다 나를 더 잘 알았던 그가 현명한 선택을 해준 거다.


그 당시에는 전화, 메시지, 전부 차단해버린 그가 원망스러웠지만 일말의 여지도 남기지 않아 준 덕에 미련 없이 그를 잊는 데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제야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 번 서로에게 상처 주지 않고, 더 창피한 꼴 보이지 않고, 그냥 예쁘게 추억할 수 있게 해줘서 고맙다는 생각. 그와의 연애 덕분에 나는 이제 서운한 걸 서운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됐고, 더 나은 연애를 할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 어쩌면 그 또한 애인이 서운하다고 말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는 먼저 알아챌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지 않을까?




양유정

그림 소우주 (instagram@sowoojoo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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