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촌, 옥인동과 똑 닮은 골목이 있는 동네
우리 가족은 공항 근처, 관광객이라면 한 번쯤은 들렀을 탑동에 산다. 아무 것도 모르고 한여름 번갯불에 콩 볶듯 살게 된 이곳은 서울에서 살던 동네 서촌, 옥인동을 똑 닮았다. 무근성(성안)이라고도 불리는데, 원도심이라 골목 곳곳마다 자기만의 이야기가 있다. 반듯하게 쌓아 올린 돌담을 볼 때마다 서촌 골목의 한옥이 떠오른다. 오래된 단독주택과 빌라, 전깃줄로 복잡하게 얽힌 골목길도 닮았다. 대형마트 앞 야자 가로수길은 서촌 골목의 벚꽃 거리 감성을 떠올리게 하고. 서촌에 청계천의 발원지인 수성동계곡이 있다면 한라산 백록담에서 내려와 바다와 만나는 산지천과 용연계곡이 있다. 서촌의 통인시장과 탑동의 동문시장, 경복궁과 제주목 관아. 화려했던 과거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세련된 맛은 없지만 정이 가고. 한마디로 걷는 재미가 좋은, 골목이 살아있는 동네에 살고 있다. 내가 서촌을 빠져나올 때쯤 상가들이 골목에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는데, 탑동도 골목골목마다 감성 밥집이며 카페며, 소품 가게까지. 젊은이들에게 레트로 감성의 힙한 가게들이 생기고 있다. 토박이 동네였지만 점점 외지인이 하나둘씩 늘어나는. 어쩌면 변화하는 모습까지도 서촌을 닮아가고 있는듯하다.
외지인이 잘살지 않는 탑동을 거주지로 선택한 이유는 딱 3가지다. 남편이 자주 다녀갈 수 있도록 차로 공항 10분 거리이고. 나 혼자 아이를 키우기에 불편함이 없는 대형마트, 365일 야간 병원, 재래시장, 은행, 우체국, 파출소, 갤러리, 박물관, 고궁 등 도심답게 모든 편의시설이 걸어서 5분 거리다. 마지막으로 초등학교 도서관이 마을 도서관도 겸하고 있어 저녁 9시까지 운영한다. 제주에서 살 집을 어디에 구해야 할지가 가장 고민일 텐데 제주는 지역마다 특성이 많이 다르고 장단점이 분명하다. 나의 경우는 남편이 오가는데 조금이라도 편하길 원했고, 생활의 편리성과 문화 체험, 아이들이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는 환경을 고려했다.
살아보니 입도 당시 딸이 5살이고 병 치례가 잦았던 걸 고려하면, 이보다 더 좋은 선택지는 없었다. 실제로 편의 시설 덕분에 초기 제주 생활 적응하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됐다. 야간 병원이 있어 아이들이 아프면 남편이 없어도 언제든지 데려가면 됐고. 일상의 볼일 보기도 편했다. 문화시설도 많고 공연과 전시도 다채롭게 열려서 아이들의 체험도 정말 다양하게 할 수 있었다. 남편은 매주 내려오는데, 공항이 멀었다면 절대 그럴 수 없었을 테고 나 또한 공항을 오가느라 매우 힘들었을 거다.
우리가 사는 집은 엘리베이터 없는 빌라 4층이다. 엘리베이터 없는 생활에 적응하느라 초기에는 꽤 힘들었지만, 지금은 4층쯤이야 하며 하루에도 몇 번씩 오르내리며 다리 근육을 단련시킨다. 제주에서는 아직까지 엘리베이터 있는 집이 귀하다. 신구간(제주 사람들이 1년 중 이사하는 기간)도 아니었고, 자녀와 함께 살만한 집들이 많지 않은 동네여서 지금 집도 아주 귀하게 구했다. 같은 건물에서 무려 6년을 살고 있다. 모두가 육지에서 제주로 오면 타운 하우스나 마당 있는 전원주택에 살 줄 알게 되지만. 나는 말 그대로 토박이 동네에서 리얼 제주 생활을 하는 중이다. 이젠 먹바퀴와 지네, 도마뱀쯤은 그냥 쓱 하고 덤덤하게 지나칠 정도가 되었다. ‘응 이게 제주지.’라는 마음이다.
나는 4층 우리 집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아낀다. 높은 건물이 없으니 시야에 막힘이 없고 남쪽으로는 한라산 백록담이 보인다. 서쪽 창으로는 옛날 한라소주 공장 건물의 코발트 블루색 큰 지붕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데, 언제 봐도 기분이 쨍하다. 파랑 지붕 건너 길 건너 다홍색 지붕 집 담장 너머로 보이는 나무는 계절의 변화를 알려준다. 365일 다른 모습의 해질녘 노을 쇼도 빼 놓을 수 없다. 몇 분 간격으로 날아오르는 비행기를 보며 설레기도 했다가 어디론가 떠날 수 없다는 섬의 한계에 아쉬움도 종종 느낀다.
이렇게 오래 지낼지 모르고 살게 된 곳이지만. 걷는 게 즐거운, 이야기를 가득 품은 동네여서 혼자여도 가슴이 따뜻하다. 오늘도 산책하며 걷다 서기를 반복했다. 돌담 너머로 삐죽 나온 감나무와 석류나무 열매를 보며 혼자 입맛을 다시고, 옆집 담장 높게 핀 노랑 수세미 꽃을 보며 수세미가 열리면 하나 얻어 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보통은 10분만 걸어야지 하다가 마음이 움직여 탑동 해안로까지 걸을 때면 1~2시간을 훌쩍 넘긴다. 오는 길에 마음 끌리는 곳에서 빵도 먹고 커피까지 한잔 마시면 최고다. 돌담 사이 하늘거리는 풀꽃을 만나면 그 시간이 귀해 한참을 머무른다. 지금은 아이들이 훌쩍 커 픽드랍 하느라 하루 24시간이 모자라 예전처럼 동네를 마음껏 못 누비지만, 오늘은 또 어떤 새로운 이야기가 우리 동네에 숨어 있나 싶어 매번 설렌다.
사실 집을 구할 때는 외지인 동네, 토박이 동네에 대한 개념조차도 없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토박이들만 사는 동네라는 걸 알게 되었고. 아는 사람 한 명 없던 동네에서 이웃들과 종종 정을 나누니 적응을 그래도 잘했구나 싶다. 이 동네에 산 덕분에 리얼 제주를 경험했고, 나 또한 알게 모르게 제주에 스며들 듯 변화할 수 있었다.
두 아이와 함께한 6년의 제주살이를 정리하는 중입니다.
흔들리는 40대를 오롯이 제주에서 보냈습니다.
이대로 떠나기에는 너무 아쉬워 그간의 시간들을 제 식으로 잘 정리하고 싶어졌습니다.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야 또 새로이 시작할 수 있을테니까요.
제가 정리하는 글들이 곧 6년이란 시간에 대한 제 마음일 거라 생각합니다.
어떻게 끝이날지 알 수 없지만. 담담하고도 아름다운 마무리가 될 수 있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