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이 주는 삶
내가 캐나다와 제주를 선택한 이유는 단 하나, 자연이다. 우리 부부는 아이들에게 ‘자연과 함께하는 삶’을 유산으로 물려주고 싶었다. 남편은 대도시지만 외곽시골 동네에서 도랑치고 가재 잡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고. 나 또한 방학 때마다 시골 할머니 집에서 지냈다. 어릴 때의 순간들이 모여 현재의 남편과 나를 만들었고, 신나고 푸근한 아름다운 자연의 기억을 남겨주었다.
제주도에서 살아보니 육지의 삶과 별반 다를 게 없는 사람 사는 곳이다. 누구는 환상의 섬이라고 하지만 끼니 걱정, 자식 걱정, 부모 걱정 등등 나는 매순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다른 점 하나, 제주도는 섬 전체가 놀이터다. 내가 제주를 향해 마음을 여니, 제주는 우리 아이들에게 백만 가지 놀이를 제공했다. 막대기 하나만 있어도, 어디를 가도 자연에서 놀이를 만들어 내는 아이들을 보며 흐뭇했다. 나 역시 아이들이 놀 때 더 신나게 놀았고, 아이들과 자연에서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내게 놀이이자 힐링이었다. 우리는 계절마다 제주에서만 할 수 있는 자연 놀이를 하며, 몸도 마음도 훌쩍 자랐다.
매화와 갯무꽃이 봄을 알리면 겨우내 움츠렸던 마음의 기지개를 켜고 숲으로 바다로 향한다. 드라이브를 하다 풍경이 아름다운 곳을 만나면 아무 데나 차를 세우고 돗자리와 캠핑 의자를 편다. 발길 머무는 곳이 곧 보물 여행지다. 아기자기하게 넓게 핀 이름 모를 꽃으로 반지와 목걸이도 만들고. 돗자리에 벌러덩 누워 바다에서 불어오는 봄바람을 마음껏 들이킨다. 벚꽃이 질 때 쯤이면 아이들과 벚꽃비를 맞으러 다닌다. 몇 년 전 쏟아지는 장대비에 우의를 입고 서귀포 걸매생태공원에서 맞은 벚꽃비는 아이들이 신나고도 아름다웠다고 두고두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4월이면 고사리, 5월이면 산딸기와 버찌를 따러 우리만의 아지트로 출동한다. 딸이 매년 5월을 손꼽아 기다리는 이유다.
제주의 여름은 단연코 숲과 바다이다. 가장 많은 놀거리가 존재하는 계절이다. 여름의 숲은 고막을 시끄럽히지 않는 유지매미의 울음소리로 가득 찬다. 검붉게 읽은 오디도 따 먹고 숲 평상에서 돗자리를 깔고 지내면 천국이 따로 없다. 특히, 우의를 입고 거니는 여름의 비 오는 숲은 가히 장관이다. 삼나무 숲 사이로 안개가 자욱한 몽환의 분위기는 마치 ~ 세계에 와 있는 기분이다. 아이들과 동양 달팽이를 찾고, 물 머금은 이끼가 만든 자연의 그림을 찾는다. 또한 여름 바다는 온종일 놀아도 지치지 않는다. 이른 아침 그늘막을 치고 라면을 끓여 먹고 책도 읽으며 여유를 즐긴다. 낮 동안은 수영과 스노쿨링을 하고, 가끔 낚시도 한다. 해가 질 때 즈음 물이 빠지면 생물들을 잡느라 아이들이 또 바빠진다. 온종일 즐겨도 지치지 않는 파라다이스가 여름 바다이다.
우리 가족이 특히, 여름을 좋아하는 이유는 사슴벌레 채집이다. 매년 여름 밤이면 사슴벌레를 찾아 제주도 전역을 다닌다. 풀벌레 소리만 들릴 뿐, 아무도 없는 숲에서 우리 가족만 함께하는 고요함이 그저 경이롭다. 하늘에서는 은하수 별이, 저 멀리선 바다별(한치잡이 배 집어등 불빛)이 우리를 향해 비춘다. 아들과 딸은 다년간의 훈련으로 엄청난 동체시력을 자랑한다. 아들이 “아빠. 넓사(넓적사슴벌래)!”라고 외치면, 질새라 딸이 “아빠. 다우리아!”라며 맞장을 뜬다. 아빠와 아이들이 수 km를 걸으며 채집하면, 나는 차로 조심히 뒤따른다. 어디 가서 이 늦은 시간에 이리도 재미있는 놀이를 즐길 수 있을까? 사슴벌레 채집은 우리 가족에게 늘 가슴 뭉클해지는 밤을 전해준다.
우리의 가을은 그야말로 소소한 자연놀이의 계절이다. 매년 입추만 지나도 바람이 다르고, 처서를 지나면 바람이 선선해진다. 여름의 뜨거움을 피해 바다와 숲만 찾던 우리도, 굳이 이벤트를 만들지 않고 일상에서 소소한 가을의 자연을 즐긴다. 음식을 포장해 가까운 용두암이나 해변에서 우리만의 피크닉을 즐기기도 하고. 바다 아지트에서 오며 가며 물고기를 잡기도 한다. 해안가에 넓게 펼쳐진 용암 지대는 아무 것도 없는 돌무더기지만, 아이들의 무한 놀이터가 된다. 가을의 노을은 정말 아름다운데, 입도 초기만 해도 주방에서 저녁을 짓다 몇 번을 아이들과 석양보러 바다로 향했다. 타임랩스처럼 펼쳐지는 하늘의 장관을 보며, 바닷가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먹기도 했다. 육지처럼 산이 높질 않아 언제든지 오를 수 있는 가을 오름이야말로 으뜸 중의 으뜸이다. 아이들은 오름 하나 오를 뿐인데, 자연 체험, 놀이, 역사, 과학 공부까지 올패스 놀이터이다. 내가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발걸음 발검음 마다 아이들의 놀잇감이니, 어느 오름을 가도 즐거운 최고의 가을 놀이터다.
제주 겨울의 꽃은 눈이다. 겨울을 보내야 진정한 제주를 안다고 말한다. 눈이 오면 자연 놀거리도 많아지는데, 자연에서 타는 스릴 만점의 천연 눈썰매장은 최고이다. 겨울이면 차 트렁크에 포대랑 눈썰매를 가지고 다니는데, 길 가다 놀기 좋은 곳을 만나면 그곳이 곧 ‘자연 눈 놀이터’가 된다. 눈이 오면 제 키보다 높은 눈사람을 만들고, 반찬통과 분무기로 이글루도 만들고, 눈을 꽁꽁 뭉쳐 눈싸움도 하고, 푹푹 빠지는 눈 산더미에 벌러덩 눕기도 한다. 육지와는 사뭇 다른 풍경들이 펼쳐진다. 그리고 눈이 올 때마다 빼먹지 않는 것은 설산 가기이다. 아이들과 설산을 즐기기에는 ‘어승생악’이 최고다. 아이젠을 신고 뽀드득 뽀드득 눈 밟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설레게 만든다. 정상에서 호호 불며 먹는 컵라면이나 믹스 커피도 빼놓을 수 없는 재미다. 한라산 CCTV에 우리의 모습을 한 컷 남기고 하산하다. 나무를 붙잡고 ‘어어’하며 미끄러지기도 하고, 아예 엉덩이 썰매를 타고 내려오기도 한다. 나뭇가지를 흔들어 머리 이로 맞는 눈 폭탄은 재미 중의 재미다. 그리고 귤 따기 체험도 빼 놓을 수 없는 우리들만의 겨울놀이다. 햇수로 벌써 5년. 단순한 체험을 떠나 매년 어디든 농장에서 대규모의 귤 따기를 할 일이 꼭 생기는데. 차에 귤 따기 전정가위가 늘 있다는 건 안비밀이다.
제주에서 아이들과 지내며 어릴 때 경험했던 자연의 기억, 감성들이 되살아났다. 파도가 내 발을 적실 때마다, 편백나무로 빽빽이 둘러 쌓인 숲에서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적막하다 못해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에서 숨죽이며 밤하늘의 별을 볼 때마다, 어릴 적 자연과 함께 한 기억이 올라 마음이 따뜻해졌다. 성인이 된 내가 힘들 때마다 나를 위로해 준 것은 자연이었다. 아름다운 제주의 자연을 아이들이 마음껏 누리길 원해 함께했지만, 내가 더 즐거웠고 더 위로받았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자연의 씨앗을 구석구석 뿌려 주고 싶다. 제주와 친구로 지낸 삶이 성인이 된 아이들의 걸음 걸음에 힘이 되어주길 바란다.
두 아이와 함께한 6년의 제주살이를 정리하는 중입니다.
흔들리는 40대를 오롯이 제주에서 보냈습니다.
이대로 떠나기에는 너무 아쉬워 그간의 시간들을 제 식으로 잘 정리하고 싶어졌습니다.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야 또 새로이 시작할 수 있을테니까요.
제가 정리하는 글들이 곧 6년이란 시간에 대한 제 마음일 거라 생각합니다.
어떻게 끝이날지 알 수 없지만. 담담하고도 아름다운 마무리가 될 수 있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