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라면 다르게 살겠지
“엄마! 제주도에는 도대체 왜 왔어요? 이제는 솔직하게 말해줄 때가 되지 않았어요?”
“왜 왔냐고? 너희들 어린 시절 자연에서 마음껏 놀고 경험하게 해주려 왔지.”
중 3 아들이 뜬금없이 내게 물었다. 순간 당황스러웠다. 제주에서 6년을 살았는데도 제주에 왜 왔냐고 묻는다. 아들 물음에 급히 대답하고선 다시 한 번 기억을 더듬어 보게 된다. 내가 제주에 왜 왔을까?
내 나이 마흔 하나. 규칙적으로 갈 곳이 없다는 건 생각보다 꽤 나를 힘들게 했다. 퇴사 후 갑자기 생긴 많은 시간은 나를 향해 꼬리를 물고 또 물었다. 아파트 천장에 매달린 화려한 샹들리에가 눈부시게 반짝거릴 때마다 나는 이 집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여태와는 다른 내가 되고 싶었다. 나를 송두리째 변화시키고 싶었다. 그러면 마흔 이후의 내 삶도 달라질 거라는 막연한 희망이 있었다. 나의 그 생각과 맞물린 게 캐나다 행이었다. 동네 언니가 아이들을 캐나다로 보냈다며 사진을 보여주는데, 평소 내가 원하는 아이들의 삶이었다. 남편과 떨어져 멀리 갈 생각은 한 번도 안했는데, 갑자기 가슴이 쿵쾅거렸다. 아이들에게 자연의 삶과 세계를 마음껏 누빌 수 있는 영어 구사력을 선물하고 싶었다. 그리고 한국에서 멀고 먼 캐나다라면 나 역시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렇게 나는 몇 달 만에 준비를 마치고. 캐나다에서도 한국에서 가장 먼 곳, 노바스코샤주로 아이 둘을 데리고 떠났다.
떠나기 전 집을 계약하고 어학원, 학교 등 많은 부분을 결정하고 갔다. 1~2년의 여정을 생각했지만, 가보고 좋으면 오래도록 지내고 아니다 싶으면 바로 돌아오기로 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캐나다에서 몇 달을 채 보내지 못하고 다시 돌아왔다. 가장 걱정했던 아이들은 적응을 아주 잘했지만, 캐나다는 자연을 제외하고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가기만 하면 영어는 절로 되는 줄 아는데, 적응 문제로 고통 받는 아이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한국 사람이 거의 없는 곳이라 더 폐쇄적이었고, 엄마들의 삶은 한국과 다를 바가 없었다. 더 이상은 아니다 싶어 바로 짐을 쌌다. 캐나다를 갈 때도 즉흥적으로 가야겠다고 마음 먹었기에. 돌아올 때도 결정은 쉬웠다. 물론 돌아오는 과정에서 배액배상 등 손해도 만만치 않았다. 당장 한국에 돌아가면 어디서 지낼까 몇 날을 고민했다. 내가 변하려면, 아이들에게 자연을 선물하려면 서울이 아닌 다른 곳이어야 했다. 울릉도를 갈까? 시골에서 살아볼까? 별의별 생각을 하다 제주에서 살기로 결정했다. 캐나다에서 우리가 지내던 곳과 가장 비슷하고 가족도 자주 만날 수 있다. 무엇보다 자연에서의 삶과 아이들의 교육 둘 다를 만족시켜주는 곳이 바로 제주였다.
그렇게 나와 아이들의 긴긴 제주살이가 시작되었다. 어떻게 보면 제주살이 또한 주변 가족들에게는 통보였다. 짧게는 6개월, 길게는 1년만 살려고 했던 제주에서 무려 6년째 살고 있다. 퇴사 후 2년 이내 커리어 우먼으로 다시 복귀하려던 계획도 무산되었다. 제주에서 산지 3년이 됐을 때였나. 아들은 예전 학교가 너무 그리워 몇 번이나 눈물을 훔쳤다고 말해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코로나라는 변수 때문에 이렇게 길어지긴 했지만. 큰 아이에게는 충분히 설명을 했어야 했다. 아이들을 가장 먼저 고려해 선택한 제주행이었지만, 내 설명이 충분치 않았다.
많은 것을 빠르게 결정하고, 결정 후에는 뒤를 돌아보지 않던 나는 제주에서 살며 꽤나 많이 변했다. 변하길 원했던 삶이라면 6년 전 나의 선택은 성공한 거고. 30대에는 몰랐던 인생의 희노애락을 제주에서 다 겪은 걸 보면 나는 다소 무모했음을 고백한다.
두 아이와 함께한 6년의 제주살이를 정리하는 중입니다.
흔들리는 40대를 오롯이 제주에서 보냈습니다.
이대로 떠나기에는 너무 아쉬워 그간의 시간들을 제 식으로 잘 정리하고 싶어졌습니다.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야 또 새로이 시작할 수 있을테니까요.
제가 정리하는 글들이 곧 6년이란 시간에 대한 제 마음일 거라 생각합니다.
어떻게 끝이날지 알 수 없지만. 담담하고도 아름다운 마무리가 될 수 있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