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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맨 Apr 19. 2023

4월은 잔인한 달인가

전역 후 복학 첫 학기의 시간표는 아름다웠다. 매주 월-목요일 9시부터 12시까지 수업을 듣는 게 전부였다. 평일에는 점심을 먹으면 자유시간이었고, 친구들보다 하루 일찍 주말을 시작했다. 아직은 군대에서 습관이 남았었는지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가장 좋아했던 수업은 매주 화, 목요일 9시에 열리는 <문학입문> 수업이었다. 한 때는 영문학도를 꿈꿨지만 사회과학계열로 진학해야 했던 설움을 달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고, 교수님의 수업 방식이 흥미로웠기 때문이기도 했다. 교수님은 수업 시작 전 늘 화두를 던졌고, 학생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답을 했다. 사실 교수님이라고 부르는 것보다는 시인이라고 부르는 게 적절한 분이었다. 본인의 필명으로 자신을 소개했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마저 멋진 분이었다. 아니, 멋진 시인이었다.


4월은 잔인한 달인가요?


중간고사를 앞둔 4월의 어느 수업을 열었던 시인의 화두였다.


"곧 있으면 시험기간인데, 벚꽃이 만개한 걸 보니 4월은 잔인한 달이 맞는 것 같습니다. 꽃놀이를 혼자 가자니 애처롭고, 같이 갈 사람이 없어서 비참합니다."

맨 앞자리 앉아서 눈을 반짝이던 나의 답변이었다. 강의실이 수강생들의 옅은 웃음으로 진동했다. 시인은 T.S. 엘리엇의 <황무지> 속 한 구절이라며 시를 소개했다. 1차 대전 이후 정서적으로 황폐해진 서양인들에 관한 이야기라고 했다.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을 느낄 여유도 없이 마음이 식어가는 사람들을 가엽게 여기는 시인의 마음이 전해지는 시라는 생각을 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시험기간에 벚꽃이 만개하는 것은 극악무도한 행위임이 분명하다.


2023년, 올해는 예년보다 벚꽃이 일찍 폈다. 3월에 만개한 벚꽃은 봄비를 맞고 낙화했다. 4월 무렵 축제를 약속했던 장소에는 어느새 분홍이 지나고 초록이 가득했다. 벌써 여름이 온 것 같았다. 뉴스에서는 이런 현상을 두고 기후위기라고 했다. 커뮤니티에서는 버스커버스커의 <벚꽃엔딩>이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상위권을 차지하지 못했다는 말이 유머로 통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2023년 4월 19일은 여름 같다. 녹음은 짙어졌고, 라일락 향은 낮밤을 가리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벚꽃보다 라일락을 더 좋아한다.


아침에 종종 시를 읽는다. 박준, 한강, 기형도를 좋아한다. 그들의 시를 좋아한다기 보다는 그들을 좋아한다고 표현하는 게 적확하다. 며칠 전에는 나에게 문학을 알려주었던 시인이 떠올라 T.S. 엘리엇의 <황무지>를 읽었다. 마음에 드는 시구가 있어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업로드했다. 3개월 만에 올리는 게시물이었다.


살아 있던 그는 지금 죽었고

살아 있던 우리는 지금 죽어 간다

약간씩 견디어 내면서


"무슨 일 있냐?"

오랜만에 가까운 선배들에게 연락이 왔다. 시를 읽다가 시구가 마음에 들어 SNS에 올렸다고 답했다. 선배들은 엘리엇의 시인 걸 몰라서 연락한 것은 아니고,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냐고 물었다. 그렇게 서로의 근황을 주고받았다. 누군가는 내게 '힘든 일이 있으면, 힘이 든다고 티를 팍팍 내도 좋다.'라는 격려도 덧붙였다.


"기억이 있어서 그래."

그중 가장 츤데레 같은 선배의 메시지가 유독 마음에 밟혔다.


[OOO, 본인상]


몇 해 전, 대학 동아리 메신저방을 떠돌던 메시지가 생각났다. 농담인 줄 알았다. 농담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바람은 헛했다. 많이 가깝지는 않지만, 따뜻했던 사람이었다. 주말이면 학교 운동장에 모여 캐치볼을 하기도 했기에 그랬다. 함께 사회인야구를 하던 시절에 선발투수로 나서는 일이 많았는데, 팀에서 포수를 맡던 선배는 자청해서 캐치볼 상대가 되어주었다. 더운 날씨에 공을 받아내기만 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선배는 싫은 내색이 없었다.


선배가 가던 날에는 비가 많이 내렸다. 사람들은 슬픔을 잊기 위해 술을 마셨고, 목소리를 높이며 농담을 주고받았다. 살얼음 같은 강가를 지나는 것만 같았다. 누구도 옅은 얼음을 깨지 않기 위해 조심하는 분위기였다. 밤은 조금씩 깊어졌고, 누군가 먼저 울음을 터트렸다. 이윽고 얼음은 깨졌고, 우리는 강물에 빠진 사람처럼 울먹이며 눈물을 쏟았다.


요절하는 게 꿈이었다. 일찍 죽는 게 나를 미완의 대가로 완성하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김현식, 김광석이 그랬고 서지원도 그랬다. 왼손으로 기타를 치던 커트 코베인도 그랬고. 이제는 쉬이 요절, 죽음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 촘촘하게 얽힌 관계에서 누군가 하나가 끊어지면 관계가 무너지는 것을 목격했고,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사람을 우연히 만났을 때, 오히려 그가 살아있어서 다행이라는 안도를 하기도 했다. 죽음은 오직 신만이 다룰 수 있는 영역이라고 믿게 되었다.


매일 잊는 것이 일상인 현대인들에게 4월은 잔인한 달일까? 겨우내 추위를 견디고 피워낸 꽃들을 보며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누구를 떠올릴지 궁금해졌다.


내게 4월은 잔인한 달이다. 우주에는 에너지의 총량이 정해져 있고, 무엇의 탄생을 위해서는 무엇이 소멸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라지고 잊히는 것들에 관해 생각한다. 그리고 사람들을 생각한다. 4월이면 무심코 휴대전화를 들어 멀어진 사람들에게 안부를 묻는다. 마침 꽃도 피었고, 명분은 충분하다. 날씨를 핑계로 만나서 술잔을 기울이기도 한다. 그렇게 관계는 느슨하게 이어진다.


결국 우리는 서로를 향한 약간의 관심과 마음을 주고받으며 사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나의 안부를 물어준 다정한 선배에게 밥을 사겠다고 연락을 해야지. 4월이니까. 4월은 잔인한 달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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