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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 스텔라 Dec 20. 2020

[행복한 남자] 인간의 목적

학창 시절, 나에게는 수업에 열중하지 못하는 '주의력 결핍' 증세가 있었던 것 같다.

 사춘기가 시작될 무렵이라 그랬는지 '오늘은 꼭 정신 차리고 들어야지...' 하면서도 선생님이 하는 말에 뭐가 하나 꽂히면 그때부터 상상의 나래를 펴곤 했다. 그중에 하나가 첫 번째 윤리 시간에 있었던 기억이다. 

선생님이 '인간의 목적은 행복의 추구이다'라고 교과서에 있는 구절을 읽어주신 그때부터 내 마음에는 몇 가지 질문들이 올라왔다.

'목적이 행복이지 왜 거기다 추구라는 단어가 붙었을까?'

'추구는 목적을 이루려고 하는 행동이잖아?'

'인간에게 목적이 있나?'... 과 같은 질문이었던 같다.(?)

어쨌든 생각 때문에 선생님의 설명을 놓쳐버렸으니 계속 질문으로 남았고  나는 행복에 대해 관심이 많은 성인으로 성장했다.



'행복'이라는 단어에 꽂혀서 넷플릭스 영화 #행복한남자 를 보게 되었다. 

덴마크에서 1898년- 1904년 사이에 발표된 8권의 대하소설을 영화로 만들었다.

원제목은 'Lykke-Per'이고 'A Fortunate Man'(행운아)이라고 영어로 번역되었다.

한국말 번역이 더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이 영화를 보면서 행운아라 불렸던 주인공을 통해 원하던 행복에 도달하는 것보다 행복을 추구하면서 살게 되어 있는 인간의 목적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학교 수업에서 딴짓하고 영화에서 배우게 되니 평생 학생이다.

영화의 줄거리.

주인공 시데니우스는 피터라는 이름을 버리고 가난하고 보수적인 목사 아버지와 함께 했던 가정에서 탈출(?) 해서 명문 공대에 진학한다. 정통 기독교 교리에 묶여서 유년시절을 상처로 보내게 한 아버지에게서 등돌리고  돌아가실 때도 가보지 않는다.

도시로 온 피터는 어려서부터 고향 바닷가에서 바람과 파도의 에너지를 이용해서 산업을 일으키는 프로젝트를 생각하며 모형으로 만들어 왔던 계획을 실행할 기회를 잡으려고 애쓴다.


가난한 공학도로서  행운을 잡기 위해 애쓴 결과, 부유한 유태인 가정과 인연을 맺게 되고 가장 많은 유산을 물려받을 큰딸과 약혼하게 된다. 

예비사위로서 드디어 그동안 혼혈을 기울여 만든 프로젝트를 실행에 옮길 기회를 갖는데... 유태인 재력가들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동의를 얻게 되지만 마지막 관문인 정부 관료 과학자가 자신의 프로젝트를 경멸한다고 부딪치면서 계획이 무산된다.  그때 아버지 사후에 목사관에서 나와서 형집에 얹혀사는 엄마마저 돌아가시게 되자 피터는 망설이다가 어머니의 관을 아버지 곁에 묻어주기 위해 고향으로 가게 된다.


고향에 온 피터는 아버지의 동료 목사관에 머물면서 아버지와 가족을 버리고 이제 약혼녀를 떠나게 된 자신을 괴로워하면서 신에게 용서해 달라고 울부짖는다.

그러면서 고향이 주는 평온함 속에서 다시 시작해 보려고 한다. 부유한 유태인 배경의 사람들과 자신은 너무 다르다고 하면서 약혼녀에게 결별을 고하고 목사의 딸과 결혼해서 가정을 이룬다. 

한편 약혼녀 야코베는 피터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으나 피터에게 알리지 않고 중절 수술을 받고 아버지에게서 받은 유산으로 고아들을 위한 학교를 세운다.


운하와 풍력발전을 이용해서 공공산업을 일으켜 사회에 유익이 되고 자신이 살아가는 의미를 찾고 싶었던 꿈이 실행되지 못한 좌절 속에서도 피터는 연구를 계속한다. 가정생활에서는 지난날 아버지와의 관계처럼 아들과 친밀해지지 못하고 이방인 같은 무미건조한 삶을 산다.


아들의 생일날, 아내의 소꿉친구와 더 친밀한 아들을 보면서 죽은 아버지 무덤으로 간다.

그리고 가정으로 돌아가지 않고 허허벌판에서 홀로 살면서 풍력 실험을 계속하다가 암에 걸려서 시한부를 살게 되자 옛 약혼녀 야코베에게 찾아와 달라고 한다. 피터는 야코베가 세운 학교에 자신의 유일한 유산과 프로젝트를 남긴다.(이 풍력 프로젝트는 실제로 1891년 덴마크에서 발명되고 개발된 Poul La Cour 풍력 발전기로 보인다. 여기서  소설의 소재를 가져왔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눈 피터와 야코베의 대화가 끝까지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목적을 짐작하게 한다.


나는 평생을 정처 없이 소외감 속에서 살아왔어.하지만
여기서 (고독) 마침내 나 자신을 자각하게 되었지.
... 내게  상처 많이 받았어?


야코베는 피터의 손을 잡고 눈을 맞추며 대답한다.


당신을 알게 되서 정말 행복해 (Very lucky).
당신이 준 기쁨과 슬픔 때문에 삶의 의미를 찾았어.
이 학교는 당신의 산물이야.그런 면에서 그 아이들은 모두 우리 아이들이지.

피터가 추구한 행복은 '자신이 되는 것'이었다면 야코베가 찾았던 행복은 '삶의 의미'였다.

인간의 목적은 '자기 자신으로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이고 이것이 행복의 추구라고 하겠다.

이런 의미에서 '행운아'는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을 만났고 지금 의미 있는 삶을 사는 야코베일 것이다.


피터는 아버지와의 관계가 어긋나면서부터 자신과의 관계도 어긋나 버렸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관계의 대안으로 자신을 쏟아부은 일이 성공해도 관계에 만족할 때까지 계속 행복을 추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신을 지배하려는 아버지와 같은 권위의 인물에게 저항하느라 소중한 관계를 다 잃어버린 피터를 보면서 완고했지만 깊은 아버지의 사랑을 신뢰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안타까웠다.


권위인 아버지와의 좋은 관계가 행복의 열쇠라고 한다면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의 방향도 '관계'여야 할것이다.

피터의 프로젝트가 사람에게 유익한 삶을 제공하긴 하겠지만 사람을 행복하게 하지는 못한다.

끝까지 관계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다.


피터의 말처럼 인간은 자신과의 관계만 남는 고독에 이를 때 죽음을 맞을 준비가 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살아있는 인간의 목적은 '행복의 추구'가 맞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바닷가 언덕에 서있는 피터의 뒷모습이  카스파르다비드프레드리히 그림 안개바다위의방랑자 와 같았다.

바다를 건널 준비가 되어있는 인간에게서 느껴지는 고독과 방랑(추구)의 끝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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