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을 돕는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모두가 도움을 주고 받는 것에 대해 더 깊이 생각했으면 한다.
살다 보면 '도움'이라는 것을 통해 불쾌한 경험을 할 때가 있다. 그것에 대해서 모를 때는 괜찮지만, 알게 된 후에는 참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대학에 들어가기 전, 사회복지학과 면접에서 '도움을 준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때 나는 내가 해왔던 도움의 방식, 그리고 그것이 정말 '도움'이었는지에 대해 깊이 고민한 적이 있었을까?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했다.
나는 그동안 사람들을 도우면서, 그것이 정말 순수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나의 우월감, 인정받고 싶은 마음, 혹은 그 이후에 돌아올 이득 때문이었는지를 곱씹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도움'이라는 것은 좋은 것이고, 내가 누군가를 도왔다는 사실 자체가 의미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 면접을 준비하면서 나는 처음으로 도움을 준다는 것의 무게의 존재 대해서 깨달았다.
그 순간부터 나는 이 행위의 무게를 제대로 알아가고 싶었다. 내가 진정으로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진정한 도움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도움이라는 개념을 고찰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다양한 사회적 상황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어떤 이들은 도움의 이름으로 자신의 우월함을 과시했고, 어떤 이들은 진정성 없이 형식적인 도움을 건넸다. 또 어떤 이들은 도움을 받는 사람의 마음은 생각하지 않은 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만 도움을 강요했다. 이런 모습들을 보면서 나는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고, 도움이라는 행위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실감하게 되었다.
어느 날 유튜브에서 한 영상을 보았다. 유명 크리에이터가 노숙인에게 음식과 돈을 건네며 그 과정을 촬영하는 내용이었다. 수백만 뷰를 기록한 그 영상의 댓글에는 '감동적이다', '세상에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이 있어 다행이다' 같은 찬사가 가득했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불편함을 느꼈다. 그 도움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인지, 아니면 조회수를 올리기 위한 콘텐츠였는지 의문이 들었다. 더 나아가 이러한 '선한 영향력' 콘텐츠가 상업적으로 활용되고, 빈곤 포르노처럼 소비되는 현실이 나를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깨달음이 내 발목을 붙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한 '도움'이라는 것이 너무 쉽게, 너무 가볍게 사용되는 전반적인 현실이 견디기 힘들었던 것일까. '도와준다'는 말이 얼마나 쉽게 흘러나오는지를 보면서 나는 답답했고, 때때로 분노하기도 했다.
알 수 없는 답답한 감정을 느끼면서 나는 많은 사람을 만났고, 더 많은 사람을 떠나보냈다. 여전히 나처럼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들을 밀어냈다. 나는 '진짜 도움'을 고민하면서도, 정작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점점 고립되고 있었다. 그때 나는 또다른 사실을 깨달았다. 그 답답함조차도 결국 내 우월감이었던 것이라는 사실.
나는 타인의 도움 방식이 나와 다를 때 그것을 틀렸다고 여겼다. '함께 비를 맞는다'는 신영복 선생님의 말을 깊이 생각해보지 않고, 그저 우산을 씌우려는 사람들을 행위를 내 맘대로 위선적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점점 더 사람들을 밀어냈다.
도움이라는 행위를 더 깊이 들여다보면서, 나는 또 다른 복잡한 문제에 부딪혔다. 어떤 것이 위선이고 어떤 것이 진실인지, 나는 상대방이 아니기 때문에 알 방법이 없었다. 상대의 마음을 정확히 알 수 없다는 이 근본적인 한계에 좌절하면서, 결국 나는 도움이라는 것 자체를 포기하게 되었다.
도움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 후로는 상대의 마음을 알고 싶어서 노력했지만, 역시나 나는 그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진정으로 알 수 없었다. 남의 기분을 생각하지 않고 도움을 주는 경우, 또는 도움이 너무 명백하게 자신의 이득이나 우월감을 위한 것인 경우는 잘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 내 관점일 뿐, 상대방의 마음은 전혀 몰랐다. 지금도 모른다.
지금 우리는 '도움'이라는 말을 너무 쉽게 사용한다. 그리고 나는 그 과정에서 수많은 모순을 발견했다.
개인적인 관계 속에서 도움이라는 것은 종종 상대방의 선택을 대신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누군가가 힘들어할 때, 우리는 종종 "이렇게 하면 돼"라며 해결책을 제시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상대의 의견을 묻지도, 그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지도 않는다.
그러면서 우리는 '내가 도와줬으니, 상대도 내 말을 들어야 한다'는 식의 생각을 하기도 한다.
SNS에서는 너무 쉽게 도움을 말한다.
사람들은 '선한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말하며,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도움'이라는 행위를 이용한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진짜 도움이었을까?
때로는 그것이 단순한 자기만족, 혹은 타인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한 도구로 사용될 때가 많다.
이러한 도움의 상업화는 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한편으로는 자선단체나 NGO에서 "이렇게 불쌍한 사람들이 있으니 도와주세요"라며 취약계층의 비참한 모습을 강조해 보여주는 '빈곤 포르노(poverty porn)'가 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은 주체가 아닌 객체로 전락하고, 그들의 존엄성은 무시된 채 시혜적 동정심을 유발하는 도구로 소비된다.
더 나아가 최근에는 SNS 크리에이터들이 노숙인에게 음식을 주고 그 과정을 촬영해 올리는 콘텐츠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수백만 뷰를 기록한 그런 영상의 댓글에는 '감동적이다', '세상에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이 있어 다행이다' 같은 찬사가 가득하다. 사람들은 이런 콘텐츠에 진심으로 감동하고 측은해하며, 심지어 자신도 무언가 도움을 주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된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불편함을 느꼈다. 그 도움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인지, 아니면 조회수를 올리기 위한 콘텐츠였는지 의문이 들었다. 더 불편한 것은, 이런 '착한 콘텐츠'가 인기를 끌수록 더 많은 크리에이터들이 취약계층을 자신의 콘텐츠 소재로 활용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들의 불행이 상품화되고, 동시에 시청자들은 타인의 불행을 관람하며 감동과 위안을 얻는 기이한 순환이 생겨난다.
가장 아이러니한 것은, 이런 현상이 실제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도 한다는 것이다. 크리에이터가 인기를 얻고, 시청자는 감동을 얻고, 취약계층은 일시적일지 몰라도 물질적 도움을 받는다. 이것이 진정한 도움일까? 이런 현상들이 나를 혼란스럽게 했고, 때로는 미치게 만들었다. 도움이라는 행위가 모두에게 득이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과정에서 누군가의 존엄성이 희생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도움이라는 것이 오히려 상대를 억압하는 무기가 되는 순간도 많다.
도움을 주면서 상대의 의사를 무시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도움을 받았으니 감사해야 한다는 압박, 도움을 받았으니 상대의 말을 따라야 한다는 묵시적인 강요.
도움이라는 것이 선의에서 출발했더라도, 그것이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면 그건 정말로 도움이었을까?
나는 이런 것들이 불편했다.
그래서 더 신중해졌고, 그러다 보니 너무 경직되어 버렸다.
결국 도움을 주는 것도, 도움을 받는 것도 어려워졌다.
갈수록 깊어지는 고민 속에서, 문득 오래전 읽었던 신영복 선생님의 글이 떠올랐다. 9년 전 처음 읽었던 '남을 돕는다는 것'을 다시 찾아 읽으며, 나는 그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다.
신영복 선생님이 말한 '비를 맞는 것'은, 단순히 같이 고통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삶을 이해하고, 그 속에서 그와 함께 걸어가는 것이었다.
그것은 누군가를 돕는다는 이유로 그 사람을 의존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도움을 주는 사람이 우월한 위치에 서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상대방이 스스로 설 수 있도록 옆에서 함께 걸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동안 이 개념을 단순화했다. 나는 '가짜 도움'을 경계하면서, 내가 옳다고 믿는 방식만을 고집했다. 나는 내 방식대로 도움을 주지 않는 사람들을 틀렸다고 여겼고, 그들을 비난했다.
결국 나는 '도움'이라는 개념에 사로잡혀,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들이지도, 관계를 맺지도 못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조금 더 넓은 시각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도움을 준다는 것은 결코 단순한 일이 아니다.
너무 쉽게 사용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너무 경직되게 바라볼 수도 없다.
상대방을 이해하는 마음 없이 행해지는 도움은 부담이 되고,
하지만 도움을 경계하다가 타인을 밀어내는 것 또한 관계를 단절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나는 여전히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도움을 주는 것은 단순히 무언가를 '해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입장에서 고민하고, 그의 곁을 지키는 일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나는 9년 동안 많은 질문을 던졌고, 여전히 답을 찾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이제는, 예전처럼 도움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는 대신, 조금 더 열린 시각으로, '도움을 주는 방식'에 대해 고민해보고 싶다.
도움은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무게에 짓눌려 관계를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모두가 도움을 주고 받는 것에 대해 더 깊이 생각했으면 한다.
그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
나는 앞으로도 계속 고민하며 살아가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