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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메의 문단속, 역할과 치유의 여정

우리의 역할에 대해서

by 밝을 명 가르칠 훈 Mar 03. 2025

우리가 맡은 역할의 의미


신카이 마코토의 《스즈메의 문단속》을 보면서 저는, 우리가 맡은 역할이 개인과 사회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탐구하는 작품이라고 느꼈습니다.  스즈메, 소타, 다이진과 같은 영화 속 인물들은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며 책임을 짊어집니다. 그러나 영화는 역할 수행을 단순히 긍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역할은 때로 개인을 성장시키지만, 때로는 얽매이게도 만들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영화 속에서 '역할'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살펴보고, 그것이 일본 사회의 구조와 어떤 관계를 맺는지를 분석할 것입니다. 일본 사회에서 역할이 개인의 존재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을 통해 설명한 후, 재난 이후 피해자들에게 요구되는 역할을 예로 들어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를 더 깊이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역할을 통해 성장하는 스즈메


영화 속 인물들은 각자의 역할을 부여받거나, 수행하거나, 혹은 거부하려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역할이 개인의 정체성과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스즈메는 처음에는 아무런 역할도 없는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다. 그러나 우연히 소타를 만나고, 함께 잊혀진 문을 닫으면서 자신도 '토지시'라는 역할을 맡게 된다. 처음에는 소타가 하던 방식을 그대로 따라 하며 문을 닫는다. 주문을 외우고, 정해진 절차를 수행하는 과정은 기존의 토지시들이 해온 방식과 같았다.


하지만 마지막에 그녀는 단순히 잊혀진 문을 닫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문을 찾아서 닫는다. 마지막 문을 닫는 장소는 다름 아닌 자신의 과거, 어린 시절의 상처가 남아 있는 곳이다. 그곳에서 스즈메는 단순한 의식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과 깊이 연결된 선택을 한다.


이 장면에서 스즈메가 닫는 문은 단순한 재난의 문이 아니라, 그녀 자신의 상처, 어린 시절의 두려움과 마주하는 문이다. 처음에 소타와 함께했던 의식적인 행위와는 달리, 마지막 문을 닫는 순간 그녀는 깊은 감정적 변화를 경험한다. 어린 자신을 안아주며, 과거의 아픔과 화해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스즈메가 이 역할을 혼자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여정을 거치며 다양한 조력자들을 만나고, 그들의 도움을 받으며 점차 자신의 역할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들은 직접적으로 스즈메의 문 닫는 일을 돕지는 않지만, 그녀가 감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중요한 순간마다 도움을 준다. 그녀는 역할이 단순한 의무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형성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운다. 그리고 마침내, 스즈메는 마지막 문을 닫으며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 속에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소타와 다이진, 역할에서 벗어나려는 자와 돌아가는 자


소타는 가문의 전통을 이어받아 토지시라는 역할을 수행한다. 처음에는 이 역할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아무런 의심 없이 수행해 나간다. 그러나 의자로 변한 이후 그는 더 이상 역할을 수행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여기서 소타는 깊은 혼란을 겪는다. 그는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순간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모르게 된다. 일본 사회에서 역할이 개인의 정체성을 결정짓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단순한 곤경이 아니라 존재의 위기와도 같다.


그리고 영화는 그가 다시 인간으로 돌아온 후에도 토지시로서의 삶을 지속할지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일본 사회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온 역할이 단순한 직업이 아니라 개인의 삶 자체가 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반영한다. 소타는 결국 전통을 그대로 따르기보다는 자신만의 선택을 하려 한다. 영화는 그가 단순히 정해진 길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개척할 가능성을 열어두며 끝난다. 이는 역할을 수행하는 방식이 반드시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반면 다이진은 소타와는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그는 한때 역할에서 벗어나 자유를 원했으나 결국 다시 요석으로 돌아간다. 이는 일본 사회에서 한 번 맡은 역할에서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사회는 개인이 특정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그 틀을 벗어나려는 시도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다이진의 이야기는 역할에서 도망치고 싶지만 결국 다시 그 역할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개인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는 일본 사회에서 개인이 역할을 수행하지 않을 때 겪는 어려움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요소다.


소타와 다이진은 같은 역할을 수행하는 존재지만 그 역할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르다. 소타는 역할을 의무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려 했지만, 한계를 경험한 후에는 그것이 자신의 전부가 아닐 수도 있음을 깨닫는다. 반면 다이진은 역할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결국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영화는 이 둘의 대비를 통해 역할이 개인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며,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일본 사회에서 역할이란 무엇인가 - 《국화와 칼》을 중심으로


스즈메의 이야기를 보면서 일본 사회의 역할 개념을 분석한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이 떠올랐다. 이 책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의 인류학자가 일본 문화를 연구한 결과로, 특히 '역할'에 대한 분석이 이 영화와 놀랍도록 맞닿아 있었다.


베네딕트는 일본 사회에서 '역할'이 단순한 직무가 아니라 개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라고 설명한다. 그녀에 따르면, 일본 사회에서는 개인이 맡은 역할이 그 사람의 존재 가치를 결정하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맡은 역할을 성실히 수행함으로써 사회적 인정을 받고, 이것이 곧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방식이 된다.


일본 사회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맡은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사회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는다. 역할 수행은 곧 사회적 신뢰를 얻는 것이며, 반대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면 개인의 존재마저 의심받게 된다. 또한, 한 번 맡은 역할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는 특징이 있다.


이러한 베네딕트의 분석은 일본 사회의 역할 구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그리고 《스즈메의 문단속》에서 우리는 베네딕트가 포착한 '역할'에 대한 일본적 인식이 여전히 강하게 작용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소타가 의자로 변했을 때 느끼는 정체성의 혼란, 다이진이 결국 자신의 자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은 모두 이러한 역할 구조의 강력한 영향력을 보여준다.


그러나 동시에 영화는 이러한 역할 구조가 변화할 가능성도 암시한다. 소타가 의자에서 인간으로 돌아온 후 자신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 스즈메가 자신의 문을 찾아서 닫는 과정은 현대 일본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 잘 보여준다.


한가지 예시로, 실제 현대 일본에서는 역할의 고정성이 점차 약해지고 있다. 프리터족이나 니트족, 파이어족과 같이 전통적인 직업 경로를 거부하는 젊은 세대의 등장이나 가업을 물려받지 않는 젊은 세대들은 역할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보여준다. 이들은 정해진 길을 무조건 따르기보다 자신의 방식으로 살아가기를 원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소타의 고민과 스즈메의 행동은 단순한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라, 현대 일본 사회의 변화하는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피해자에게 부여되는 역할 - 재난 이후의 기대와 현실


스즈메의 문단속은 동일본 대지진을 모티브로 하고 있는 영화인 만큼, 우리에게 ’피해자의 역할‘이라는 관점을 제시한다. 일본 사회에서 역할 수행의 강요는 직업이나 가정 내 책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피해자에게도 사회는 특정한 태도를 기대하며, 그 틀을 벗어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실제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 사회에서 피해자들은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 '바람직한 피해자상'을 수행해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스즈메의 문단속을 볼 때 단순한 재난 영화에서 그치지 않고, 실제로 존재하는 '피해자의 역할'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 사회는 피해자들에게 슬픔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견딜 것을 요구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빠르게 회복하고, 도움을 받은 것에 감사하며, 사회에 부담을 주지 않아야 한다는 강요가 있었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들은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할 기회를 잃어버리고, 사회적 기대에 맞추기 위해 감정을 억눌르다가 잊혀졌다. 결국 재난의 피해는 고스란히 피해자들만의 몫이 됐다.


스즈메 역시 처음에는 자신의 상처를 외면당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잊혀지는 듯했다. 그러다가 역할을 부여받고, 문을 닫는 여정을 통해 조력자들을 만나며 잊혀진 문들을 닫아나가면서 자신 또한 잊혀진 피해자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녀가 마지막 문을 닫으며 어린 시절의 자신을 안아주는 장면은, 단순한 역할 수행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치유였다.


스즈메가 자신의 문을 닫는 행위에서 알 수 있듯이, 사실 모든 상처는 결국 자신이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은 변함없다. 하지만 그 상처의 치유 과정 속에서 영화에 나온 조력자들의 모습을 보며, '우리'의 역할 또한 생각해봐야만 할 것이다. 스즈메가 자신의 내면 세계를 눈앞에 두고도 알아차리지 못하듯이, 혼자서는 상처의 치유뿐만 아니라 알아차리기도 힘든 경우가 많다. 이는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사회가 피해자들에게 '바람직한 피해자' 역할을 요구하는 대신, 그들이 자신의 상처를 직면하고 치유할 수 있도록 지지하고 동행하는 것의 중요성을 내포하고 있는 장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할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영화는 역할을 단순히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를 질문한다. 일본 사회에서 역할은 개인의 정체성을 규정할 만큼 강한 영향을 미치지만, 그것이 곧 개인의 운명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스즈메가 처음에는 기존의 토지시들과 같은 방식으로 문을 닫았지만, 마지막에는 자신의 문을 찾아 닫고, 자신의 방식으로 그 역할을 수행했다. 이것은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단순한 의무가 아니라, 그것을 스스로 선택하고 재해석할 수 있는 과정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영화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반드시 정해진 운명은 아니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역할은 때로 개인을 얽매이지만, 동시에 변화할 수도 있다. 일본 사회에서 전통적인 역할 구조가 여전히 강하게 작용하고 있지만, 젊은 세대는 그것을 새롭게 해석하며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고 있다.


이제, 우리도 영화가 던지는 질문에 대해 고민해보자.


개인의 정체성을 생각할 때, '역할이란 무엇인가?'


사회적 구조 속에서, '사회가 우리에게 쥐어준 역할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공동체의 책임으로서, '역할 속에서 필연적으로 생기는 피해자들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스즈메의 여정은 단순한 재난 이야기가 아니라, 수많은 역할과 관계 속에서 치유되고 성장하는 과정의 이야기다. 그녀는 많은 이들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자신의 상처를 마주하고,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영화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일 것이다. 역할은 단순한 의무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형성되고, 개인의 성장과 치유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역할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역할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는 우리 자신의 선택이다. 스즈메처럼 우리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역할을 재해석하고, 그 과정에서 진정한 치유와 성장을 이룰 수 있을까? 스즈메의 여정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처럼, 진정한 치유는 혼자가 아닌 함께 이루어지는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어쩌면 이 영화가 우리에게 전하는 가장 소중한 메시지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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