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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지윤 Feb 15. 2021

벽장 속의 깜찍한 동거인

딱히 미신을 믿는 편은 아니지만, 이따금 왠지 불안한 생각이 들어서 지키려고 노력하는 몇몇 금기 사항들이 있다. 예를 들면 ‘잠자리는 머리를 북쪽으로 향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미신 같은 것. 이유인즉슨, 관을 묻을 때 죽은 이의 머리를 북쪽으로 향하게 해서 묻으므로 산 사람이 북쪽을 향해 눕는다는 것은 죽었다는 말이나 같다는 미신 때문이다. 어차피 지키기 어려운 일도 아니니, 꺼림칙하다 싶은 점은 미리 차단하는 편이 안심이 된다.

거의 10년 만에 이사를 하게 되면서, 내 발목을 붙잡는 미신이 또 하나 있었다. 바로 ‘손 없는 날’이다. ‘손’이란, 날에 따라 동서남북으로 다니면서 사람의 활동을 방해하고 해코지하는 악귀나 악신을 뜻하는 말이다. 손 없는 날은 이러한 악귀가 없는 날이란 뜻이므로, 이사를 하거나 중요한 행사를 할 때 날짜를 정하는 기준이 되곤 한다. 하도 오랜만에 이사하는 터라 티끌만 한 위험이라도 피하고 싶었기에, 무슨 상관이냐는 가족의 말에도 나는 바득바득 우겨서 손 없는 날을 이삿날로 잡았다. 여전히 높은 지지를 받고 있는 미신이다 보니, 손 없는 날이라는 이유로 자연스레 이삿짐 비용도 올라갔다. 돈이 조금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앞으로 닥칠지 모를 수많은 위험 요소들 중 일부를 차단할 수 있다는 생각에 무덤덤하게 넘기기로 했다.

손 없는 날 무사히 이사를 마친 우리 집은, 아무런 탈 없이 새집에서 적응을 해나가는 중이다. 아무런 탈이란,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이사를 온 첫날부터 악몽에 시달린다거나 뜻밖의 사고를 당한다거나 하는. 역시 손 없는 날에 이사오길 잘했다.

나는 이사 온 지 약 2주 만에 내 방에서 혼자 자게 되었다. 방 정리가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동안 거실에 이부자리를 펴고 잤더니 몸 이곳저곳이 쑤셨다. 새로 산 복층형 침대는 창문과 같은 높이여서, 침대 위에 눕자 왠지 여행 온 첫날밤의 기분이 되었다. 방안의 불을 끄자, 커튼을 제쳐놓은 창문 너머로 노란 반달이 보였다. 아, 어느새 달이 절반으로 이지러졌구나.

어둠 속에서 말똥말똥한 눈으로 창 밖을 감상하는데, 스멀스멀 오싹한 상상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만약 위에서 누군가가 떨어진다면. 그러다 추락하는 그와 눈이 마주친다면. 이제 상상은 날개를 펴고 날아올라, 침대 계단으로 누군가 올라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나는 벌떡 일어나 전등을 켰다. 거실로 나가서 잘까 잠시 고민하다가 바닥에 불규칙하게 쌓여있는 책 사이로 <벽장 속의 치요>가 보였다. 그래, 치요라면 무섭지 않다. 세상에 이토록 귀엽고 안쓰러운 유령은 없을 테니까. 이미 읽었던 소설이지만, 무서운 상상을 쫓아버리기 위해 난 책을 집어 들었다.



띠닥 아빠 아빠.

새카만 단발머리에 찹쌀떡처럼 하얀 얼굴을 하고 육포를 좋아하는 여자아이, 치요가 입버릇처럼 내뱉는 말이다. 말레이시아어로 ‘괜찮다’는 뜻이란다. 치요의 이 한 마디는 왠지 안쓰러운 느낌이 들면서도, 적잖이 위로가 된다. 아무리 힘든 일을 겪었다 해도,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할머니 같은 목소리로 “띠닥 아빠 아빠”라고 치요가 말해준다면 정말 다 괜찮아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쫓겨나다시피 회사를 그만두고 애인에게도 차인 게이타는, 그저 저렴하다는 이유로 다 쓰러져가는 빌라 건물의 302호로 이사 온다. 더 이상의 절망은 없으리라 생각하며 술에 취해 잠든 게이타의 앞에, 한밤중 벽장의 문을 살그머니 열고 ‘다닥다닥다닥’ 발소리를 내며 치요가 나타난다. 이 귀여운 꼬마 유령은, 그저 게이타가 먹다 남긴 육포를 먹기 위해 벽장에서 나왔을 뿐이다.

처음에 게이타는 자신이 그저 문단속을 하지 않은 탓에 근처 어느 집의 아이가 무단으로 들어온 것뿐이라고 생각하지만, 유령이라는 사실을 인지한 순간 극심한 공포에 휩싸인다. 그러나 두려움도 잠시, 가만 보니 치요는 육포를 ‘말괴기’라 부르며 맛나게 씹어먹고 칼피스워터를 꿀꺽꿀꺽 마시다 사래에 들리기도 하고 똘망똘망한 눈으로 활동사진(특히 야한 장면이 나오는 방송)을 재미나게 시청하는, 악의라고는 전혀 없는 꼬마유령이었다. 어느새 게이타는 치요와 함께 살아가는 생활에 적응하게 되고, 대화를 나누던 도중 그녀가 ‘가라유키’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1906년에 가난한 집의 딸로 태어난 치요는, 어린 시절 말레이시아에 ‘가라유키’로 팔려갔다가 말라리아에 걸려 죽은 꼬마유령이었다. 일본은 당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자국에서도 가난한 집의 여자아이들을 성매매 목적으로 해외에 팔아넘겼는데, 그러한 여성들을 ‘가라유키’라고 불렀던 것이다.

치요의 가슴 아픈 사연을 들은 게이타는 그녀를 성불해주기로 약속하고, 그 이후 두 사람의 유쾌하고 오싹한 동거 생활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벽장 속의 치요>는 오기와라 히로시가 쓴 단편집으로, 총 9편의 호러소설이 담겨 있다. 공포를 싫어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호러소설’이라는 말만으로 이 책을 멀리할지도 모르지만, 사실 오싹함을 자아내는 호러가 아니라 유쾌함과 페이소스, 그리고 뛰어난 반전이 있는 호러이다.

이 책을 통해 나는 ‘오기와라 히로시’라는 작가를 처음 알게 되었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그의 필력과 오기하라식 유머에 흠뻑 빠져버렸다. 그 이후 읽었던 <신으로부터의 한 마디>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작품이었다.

사실 최근 들어 일본 소설을 잘 읽지 않는다. 재미있게 잘 쓰인 한국소설이 많이 쏟아져 나오는 데다, 독서욕을 자극하는 일본의 작품을 만나기가 좀처럼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읽어야 할 책들은 많고, 그러다 보니 딱히 일본 소설까지 찾아 읽을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하루키나 다자이 오사무와 같은 작가들이 아닌 이상은 말이다.

독서일기를 쓰기 위해 오랜만에 다시 <벽장 속의 치요>를 꺼내 읽었다. 몇 년 만에 읽어도 새롭고 재미있고 슬프고 유쾌한 소설이다. 다음에 책 선물할 일이 생기면, 꼭 <벽장 속의 치요>로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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