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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지윤 Jul 21. 2022

자정에만 열리는 도서관

도서관의 시간

자정에 열리는 도서관이 있다. “책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Books are for all)”이라는 도서관학 5법칙에 반하여 이 도서관은 오직 한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들어선 누군가, 어느 한 시절 도서관이란 공간이 특별한 의미였던 적이 있는 누군가를 위해. 그곳에서 일하는 사서는 단 한 명의 이용자를 위해 수서를 한다. 끝없이 늘어선 서가에는 그 이용자가 보낸 삶의 낱낱을 기록한 책들로 가득하다. 이곳에서는 시간이 늘 자정에 멈춰 있다. 시침과 분침이 포개져 오랜 회포를 푸는 동안, 이용자는 어쩌면 자신이 선택할 수도 있었을 무수한 인생을 하나씩 골라 살아볼 수 있다. 방법은 간단하다. 삶의 어느 시절에 저지른 후회를 되돌리고 싶다고 사서에게 말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사서는 수많은 장서 가운데 책 하나를 건네준다. 책을 펼쳐 첫 문장을 읽으면 도서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이용자는 책 속의 삶으로 빨려 들어간다. 자정의 마법이 만들어낸 공간, 그곳은 바로 ‘미드나잇 라이브러리’다.


소설 <미드나잇 라이브러리>의 주인공 ‘노라’는 항우울제를 복용하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인물이다. 지난 인생에서 그녀에게 주어졌던 숱한 기회, 멋진 삶을 살 수도 있었을 가능성을 모두 놓쳐버렸다는 생각에 괴로워하던 노라는 자정이 가까워질 무렵 죽기로 결심한다. 짤막한 유서를 끄적인 뒤 입안에 남김없이 약을 털어놓고 다시는 빠져나올 수 없는 잠의 세상으로 풍덩 뛰어드는 노라. 그때 비로소 미드나잇 라이브러리의 문이 열린다. 그곳에는 노라가 어린 시절 자주 찾아가 함께 체스를 두곤 했던 학교도서관 사서, 엘름 부인이 있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거기에서 일하고 있었다는 듯 그녀는 부주의한 노라의 손길을 나무란다. 책이 망가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사실 자정은 내가 쉽게 맞닥뜨릴 수 있는 시간은 아니다. 사람들이 달력의 일자가 앞으로 한 칸 옮겨가는 순간을 기다리는 12월 31일에도 나는 깨어있던 적이 거의 없었다. 자정이라는 시간은 내게 그저 잠이라는 바다의 밑바닥에 가라앉아서 좀처럼 수면에 떠오르는 일이 없는 심해의 물고기와도 같았다. 어쩌다 아주 가끔 마감이 코앞으로 다가온 번역 작업에 몰두할 때 혹은 구겨진 종이 같은 근심을 다시 반듯하게 펴려고 애쓸 때 그 물고기와 마주치기도 하는데, 그러면 나는 적막한 물속에서 홀로 눈을 뜬 것처럼 고독한 기분이 된다. 그 시간 안에서 책은 내 유일한 숨구멍이자 현실 세계로 이끄는 안내자다. 책 속의 활자들을 통해서만 나는 무사히 자정의 세상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그런데 자정에 열리는 도서관이라니. 실제 그러한 도서관이 존재한다면 내가 그곳에 발을 들여놓는 일은, 몇 년째 장기 연체된 책이 반납될 확률만큼이나 희박할지도 모른다. 어쩌다 운 좋게 방문한다 해도 제대로 깨어있을지 의문이다. 책 한 장을 읽기는커녕 열람실 구석에서 코나 골지 않으면 다행이다. 이런 나와 달리 세상에는 자정에 깨어있는 사람이 꽤 많으니 혹시라도 미드나잇 라이브러리가 열린다면 문전성시를 이루지 않을까.

작가가 책 속에 구현해놓은 ‘미드나잇 라이브러리’는, 자정에 젬병인 내게도 허벅지를 꼬집어 잠을 쫓아내서라도 한번 방문해보고 싶은 공간이다. 그곳에서는 사서로 일해 오며 내가 저질렀던 후회스러운 선택을 되돌릴 수 있으니까. 이를테면 이런 후회들.     


어느 오후, 책을 몰래 훔치려던 아이를 다그치지 말고 따뜻하게 다독여 줬더라면 아이는 다시 도서관을 찾았을까. 서가 사이를 방방 뛰어다니던 아이에게 좀 더 엄한 사서의 모습을 보였더라면 모서리에 부딪혀 아이의 이마가 찢어지는 일은 없었겠지. 일본어 교실에서 어느 무례한 질문에 웃으며 답했더라면 그 학생은 계속 수업에 나왔을지도 모르는데.     


무심코 잡아당겼다가 걷잡을 수 없이 풀려나오는 올처럼 후회의 가닥은 당기는 족족 한없이 삐져나오기 마련이다. 노라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지난 세월 동안 그녀가 해왔던 온갖 후회가 《후회의 책》이란 제목을 달고 한 권으로 기록되어 미드나잇 라이브러리의 서가에 꽂혀 있었던 것. 그리고 서가의 다른 무수한 책에는 어쩌면 노라가 살 수도 있었을 삶들을 다시 살아볼 기회가 담겨 있었다. 그럼에도 오직 죽음만을 바라는 노라에게 사서 엘름 부인은 말한다.     


이 도서관은 자정의 도서관이야. 왜냐하면 이 도서관에서 제공하는 새로운 삶은 모두 지금 시작하거든. 그리고 지금은 자정이야. 여기 있는 모든 미래는 지금 시작할 거야. 여기에 그 미래가 있어. 이 책들이 의미하는 게 그거야. (…) 네가 진정으로 살고 싶은 삶을 발견하면 늙어서 죽을 때까지 그 삶을 살게 될 거야.

 -매트 헤이그,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중에서-

             

결국 사서의 끈질긴 권유에 못 이긴 노라는 책 한 권을 펼친다. 그리고 첫 줄을 읽어 내려간 순간 그녀만의 행복한 삶을 찾아 떠나는 기나긴 여정의 막이 오른다.

노라는 한적한 시골에 자리한 펍의 주인으로 살아보기도 하고, 단짝 친구가 사고로 죽어버린 세상을 경험하기도 한다. 국가대표 수영선수로서 영광된 삶을 살기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밴드의 보컬이 되어 화려한 순간을 맛보기도 한다. 빙하 연구가가 되어 북극에서 곰과 마주치는가 하면, 동물보호센터에서 개들을 돌보는 평온한 삶도 경험한다. 노라가 많은 삶을 살아볼수록 그녀가 “한 글자도 쓰지 않고서 쓴” 《후회의 책》은 점점 얇아진다.

그렇게 언제까지고 이어질 것 같던 기나긴 여정도 어느새 막바지에 다다른다. 드디어 자신이 꼭 살고 싶었던 삶을 발견하게 된 노라. 그런데 그 순간 어째선지 노라는 다시 미드나잇 라이브러리로 되돌아오고 만다. 그러더니 급기야는 꿈쩍 않던 초침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시간이 자정에 멈춰 있을 때만 존재하는 도서관,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시계가 다시 제 역할을 시작하자 도서관은 서서히 무너져 내린다. 그제야 노라는 자신이 진정으로 살고 싶어 한다는 걸 깨닫는다.     


작가는 어째서 도서관이라는 공간을 삶과 죽음의 중간지대로 설정한 걸까. 어쩌면 도서관은 조용함과 느림(혹은 거의 멈춤)이 공식적으로 보장된 거의 유일한 장소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죽음 이후에 찾아오는 고요보다는 조금 어수선한 소음이 존재하고, 시간에 등 떠밀려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삶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곳이 바로 도서관이라서. 그래서일까. 삶에 실망할 때마다 노라는 다시 도서관으로 되돌아온다. 그리고 또 다른 책을 펼치면 다시 새로운 삶으로 향하는 문이 열린다.

현실의 도서관도 어찌 보면 미드나잇 라이브러리와 별반 다를 바 없다. 철학이든 예술이든 과학이든 문학이든 저마다 삶을 글로 풀어낸 방식은 제각각이지만, 서가를 가득 채운 각각의 책에는 작가들의 삶 자체가 담겨 있으니까. 다만 미드나잇 라이브러리와 다른 점이 있다면 현실의 도서관은 모두에게 열려 있다는 것. 그러니 나락에 떨어진 사람이나 삶이 버거운 이들, 잠시나마 세상의 소음과 시간을 잊고 싶은 누군가가 있다면 망설이지 말고 근처 도서관을 찾으라 말하고 싶다. 책으로만 가득한 그 공간에 들어서면 째깍거리던 귓가의 소리는 멈추고 마법처럼 당신만의 미드나잇 라이브러리가 나타날 테니까. 운이 좋으면 당신이 고른 책 한 권이 앞으로의 삶을 좀 더 행복한 방향으로 이끌어줄지도 모른다. 책은, 아직 내가 살아보지 못한 무수한 삶을 들여다보게 함으로써 어쩌면 내게도 어떤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꿈을 갖게 해주기도 한다. 소설 속 노라처럼.     

중간지대에 서있던 노라의 발길이 죽음 쪽에서 삶으로 바뀌자 미드나잇 라이브러리는 불길에 휩싸여 사라져 간다. 다양한 삶으로의 문이었던 책들이 활활 타 잿더미가 되어가는 가운데 유일하게 타지 않은 책 한 권을 발견한 로라. 그것은 미드나잇 라이브러리에서 탈출하는 유일한 문, 백지로 된 책이었다. 그 책의 첫 장에 앞으로 펼쳐지길 원하는 삶의 첫 문장을 직접 씀으로써 노라는 그곳을 빠져나온다. 진짜 자기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세상으로.     


서로 표지를 맞대고 서가에 일렬로 자리한 도서관의 무수한 책들. 그중엔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살아갈 용기를 주었을 책도 있고 아직 한 번도 펼쳐진 적 없이 빳빳하게 바래가는 책도 있다. 그곳에서 사서는 도서관을 찾는 이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사람이다. 최선의 친절은 바로, 이용자에게 꼭 필요한 책을 찾아주는 것. 《미드나잇 라이브러리》에서 노라가 자기 삶을 찾아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책을 권해준 사서 엘름 부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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