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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지윤 Oct 21. 2023

단 하나의 테이블을 위한 맛

편백찜

식단에 제한을 두다 보니 약속이라도 생기면 일단 먹을 걱정부터 한다. 상대의 입맛이 소탈한 편이면 메뉴의 선택지는 다양해진다. 삼겹살이든 설렁탕이든 뼈다귀해장국이든 고기가 메인인 식당이라면 어디든 오케이. 문제는 나와 전혀 다른 식단을 추구하는 사람과 약속이 잡혔을 때 생긴다. 고기 위주의 저탄고지식을 하는 키토인과 채식주의자가 만나면, 하아. 정말이지 답이 없다.


날짜상으로는 분명 가을인데 내리쬐는 햇볕은 한여름과도 같았던 어느 토요일 오후, 나는 한 행사에 참여하러 일산에 갔다. 며칠에 걸쳐 책과 관련한 축제가 호수공원 근처에서 열리고 있었다. 첫 책을 출간한 뒤 이런저런 행사에 불려 가 타인 앞에서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일이 잦아졌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책의 기분이 조금 이해되었다. 서가에 고요히 꽂혀 있다가 누군가에게 대출되어 속에 품은 이야기를 반강제적으로 휘리릭 읽히는 기분이랄까. 사람의 손이 닿길 기다리는 책이 있는가 하면, 먼지에 둘러싸인 채 한없이 쉬고 싶어 하는 책도 있는 법. 책들과 마찬가지로 내 기분도 어떤 분위기의 행사인지에 따라 오락가락 바뀌곤 했다.

그날은 직접 행사를 진행해야 했다. ‘사서의 책장 탐험’이라는 주제로 내가 고른 책에 관해 이야기를 들려주는, 40분 남짓의 짤막한 행사였다. 행사장은 호숫가 근처에 마련되어 있었다. 대형 TV 두 대가 앞뒤로 설치되었고 가운데 공간에는 관객을 위한 열대여섯 개의 의자들이 강연석을 향한 채 다닥다닥 놓여 있었다. 다른 부스나 행사장에는 그럭저럭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이곳은 마치 인기 없는 변두리 라이브 카페처럼 썰렁했다. 통기타를 메고 옛 노래라도 한 곡 뽑아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행사를 함께 진행하기로 한 작가 K와 나는 적막이 감도는 행사장의 강연석에 앉아 서로 헛웃음이 삐져나오려는 걸 간신히 견디고 있었다. 행사 십 분 전. 호숫가에서 불어오는 바람만이 텅 빈 관객석을 휘젓고 다녔다. 이곳에 오던 길, K와 주고받던 말이 떠올랐다.

“아무도 안 오면 어쩌죠?”

“둘이 수다나 떨다 와야죠, 뭐.”

우려가 현실이 되어버렸다. 행사장에는 강연자인 나와 K, 좋아하는 소설가의 토크쇼를 보러 왔다가 강제적으로 붙들린 친구 L, 그리고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어색하게 객석에 앉은 행사 관계자 두 사람뿐이었다. 책을 선정하고 인용문을 발췌하고 무슨 이야기를 나눌지 고민하던 시간이 무색하게 느껴졌다. 나는 왜 여기 앉아있는가. 눈앞에 펼쳐진 장면은 실제일까, 까무룩 잠들었다가 꾸게 된 악몽일까.

처음부터 찝찝했다. 사람들이 뭔가 체험할 수 있는 즉석 행사가 아닌데 미리 모객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아무도 안 오면 둘이 수다나 떨어야겠다는 걱정부터 할 수밖에. 진짜 아무도 안 올진 몰랐지만. 행사 시작 10분 전에 마이크로 모객을 하라는 말을 듣고 나는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주위를 휘휘 둘러봐도 우리 행사에 관심을 가질 만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호숫가 근처에서 뛰노는 아이들, 강아지와 산책을 즐기는 몇몇 커플, 그리고 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벤치에 앉아 윤슬을 바라보는 은발의 사람들. 저들 중 어느 누가, 이주란 소설가의 <한 사람을 위한 마음>과 이정임 소설가의 <오르내리>와 히라마쓰 요코의 《어른의 맛》으로 풀어나가는 ‘읽고 쓰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줄까. 그때 한 여자가 아이와 함께 다가오더니 슬그머니 객석에 앉았다. 아이가 재미를 느낄 만한 내용은 아닌데 어쩌지. 총체적 난국이었다. 갑자기 배가 고파졌다. 어떻게든 40분을 빨리 보내고 밥을 먹으러 가고 싶었다. 행사가 끝난 후 K와 L, 그리고 출판사 대표 J와 저녁을 먹기로 했다. 메뉴는 무엇으로 할지 그때까지도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행사를 시작해야 할 시간이 되었고 나는 마이크를 들었다. 풍선에서 빠지는 바람 소리 같은 음성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관계자들의 모습과 이 상황이 웃겨 죽겠다는 듯한 친구 L의 표정과 아이를 동반한 엄마의 난감한(어떻게 자연스레 이 자리를 떠야 할지 고민하는)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등줄기로 땀이 주르륵 흐를 만큼 더운 날씨였지만, 기필코 오늘은 뜨끈한 걸 먹어야겠다고. 기대가 빠져나간 자리에 대신 들어앉은 이 허무를,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을 먹으며 땀과 함께 남김없이 배출해 버리겠다고.

뒤늦게 자리를 채워준 어르신 한 분의 측은지심 어린 눈빛을 받으며 그럭저럭 행사를 마쳤다. 넝마가 된 마음으로 터덜터덜 출판사 부스로 돌아왔다. 어쨌든 다 끝났다. 얼른 밥을 먹고 집으로 돌아가 침대에 눕고 싶었다. 그리고 이불킥을 하는 거다. 치욕스러웠던 오늘을 향해. 있는 힘껏.

뒷정리를 도우며 뭘 먹을지 고민하는데 결론이 나지 않았다. J는 채식을 선호했고 나는 고기 위주의 키토식을 몇 달째 유지하던 중이었다. 채소와 고기를 한 테이블에 차려놓고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뭐가 있을까. 연포탕, 샤부샤부…… 그러다 편백찜이 떠올랐다. 예전에 J를 만났을 때 함께 먹은 적이 있었다. 채소와 소고기를 편백나무 찜기에 쪄낸 음식. 채식주의자인 J도 키토인인 나도 만족할 만한 메뉴가 아닌가. 게다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이기도 하고. 쓸쓸한 객석처럼 텅 빈 위장을 뜨끈하게 채워주기에 제격이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편백찜을 먹으러 갔다.

식당은 이런저런 음식점과 카페가 즐비한 골목에 있었다. 토요일 저녁인데도 거리는 한산하다 못해 썰렁했다. 낯설지 않은 분위기. 조금 전 행사장의 풍경과 자못 비슷해서 나는 살짝 몸서리쳤다.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가니 지루한 표정으로 사장님이 TV 야구 중계를 관람하고 있었다. 그곳은 사막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영화 『바그다드 카페』에 나오는 카페 같은 분위기였다. 삶에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우리는 찜통 같은 더위와 ‘관객 없음’에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한 상태) 주인공 야스민이 우연히 발견한 칙칙한 카페 하나(여긴 편백찜 식당이지만). 그곳에서 맞닥뜨린, 역시나 삶에 찌든 카페 여주인 브렌다. 야스민의 등장으로 점점 밝아지는 브렌다와 바그다드 카페처럼, 우리가 안으로 들어선 순간부터 나이 지긋한 사장님도 식당도 활기를 되찾은 느낌이었다.

우리는 한가운데 테이블에 자리 잡고 앉아 소고기 편백찜을 주문했다. 채소만(해물은 허용) 먹어야 하는 J가 신경 쓰였는데 다행히 식사 메뉴가 딸려 있었다. 탄수화물을 제한하는 나를 제외한 세 사람은 모두 간장새우덮밥을 골랐다. 잠시 후 사장님이 큼지막한 편백나무 찜기를 들고 왔다. 채소와 고기가 익기를 기다리는데 곧이어 간장새우덮밥이 나왔다. 간장을 머금은 큼지막한 새우들이 접시에 따로 담겨 있었는데 사장님이 손수 새우를 손질해 주겠다고 나섰다. 그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새우 머리를 떼고 껍질을 깐 뒤 탱글탱글한 속살을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덮밥 위에 올렸다. 세 사람 앞에 간장새우덮밥이 하나씩 놓였다. 친구 L이 쓱쓱 밥을 비비더니 한 숟가락을 소담히 펐다. 갈색으로 물든 밥알의 산 위로 새우살이 울산의 흔들바위처럼 올라가 있었다. 그는 새우살이 떨어질세라 재빨리 숟가락을 입 안에 쏙 넣었다. 평소 간장새우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도 그의 숟가락으로 시선이 쏠렸다. 어떤 맛일까. 씹는 순간 새우가 품고 있던 간장이 톡 터지며 입안 곳곳으로 짠맛과 단맛의 세례가 쏟아지겠지. 새우의 탱탱한 식감에 묻힌 밥알들은 얼렁뚱땅 목구멍으로 떠밀려 내려가고, 썰물이 휩쓸고 간 모래사장처럼 입안에는 향긋한 바다 내음만이 남을 것이다. 맛보지 않아도,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예민해진 미각으로 간장새우덮밥을 상상할 수 있었다.

혼자 침을 꼴깍꼴깍 삼키는데 사장님이 다시 등장해서는 히노키탕의 덮개 같은 찜기의 뚜껑을 열었다. 사우나실의 문을 확 연 것처럼 찜기 안에 갇혀 있던 뜨거운 김이 순식간에 시야를 덮치더니 곧장 자취를 감췄다. 우삼겹과 각종 채소가 줄을 서듯 가지런한 모습으로 네모난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사장님은 막바지에 이른 야구 중계를 보러 자리로 돌아갔고 나는 젓가락을 들었다.

내가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목표물은 물론 고기, 우삼겹이었다. 끼니의 첫 입은 지방이어야 한다는 고실장 님(나의 식단 코치)의 조언을 잊지 않고 나는 기름이 제법 붙은 우삼겹을 쏙 집어서 그대로 겨자소스에 살짝 담갔다. 여전히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고기를 입 가까이 가져간 순간, 풀밭에서 불어오는 바람 같은 향내가 후각을 확 덮쳤다. 찜기 바닥에 깔려 있던 각종 채소가 익어가며 발산해 내는 향이었다. 고기만 쪄서 먹었다면 밋밋했을지도 모를 맛에, 채소의 은은한 향이 충분히 스며들며 풍미를 끌어올렸다. 이번에는 바닥에 깔린 숙주와 고기를 함께 집어 먹어보았다. 고기를 씹을 때마다 육즙과 숙주의 향이 어우러져 자꾸만 미각과 후각을 자극했다. 당장이라도 나는 마이크를 들고 모객 하고 싶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여기 편백찜 식당으로 오세요. 채소는 싱싱하고요, 고기는 부드러워요. 사장님도 친절해요. 간장새우덮밥을 시키면 사장님이 손수 새우도 다듬어 주신다니까요. 맛도 보장할게요. 입 짧은 작가 K도 맛나게 한 그릇을 뚝딱 비웠으니 말 다 했죠.

한편으로는 편백찜을 먹는 이 순간과 불과 몇 시간 전 행사장에서 보낸 시간이 별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을 들여 문장을 고르고 이야기를 구상하여 준비해 온 북토크. 하지만 우리의 이야기를 들으러 온 이는 단 한 명의 관객, L 뿐이었다. 그리고 이곳 식당을 찾은 식객도 우리, 한 테이블뿐이다. 여기저기 텅 빈 테이블을 보며 사장님은 허탈함을 느끼는 대신 단 한 테이블의 식객을 위해 정성스레 편백찜 한 상을 차려냈다. 한낮의 행사장에서도 객석을 채워준 이는 비록 L 뿐이었지만 그는 수첩에 메모하고 고개도 끄덕이며 우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상대가 차려낸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는, 누군가의 이야기에 공감해 주는 이가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찜 용기는 조금씩 바닥을 드러냈고 이마와 목덜미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텅 빈 객석과도 같던 위장이 배추와 버섯과 숙주, 그리고 우삼겹이라는 관객으로 가득 찬 뒤에야 나는 ‘관객 없음’에서 비롯한 허무를 조금이나마 떨쳐버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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