팟타이
누군가는 SF적 숫자의 해라 부르던 2020년에 나는 마흔이 되었다. 내게는 청춘의 절정을 상징하는 숫자 20이 두 번이나 반복되는 해이기도 했다. 청춘 둘을 품고 가는 나이가 되었으니 진짜 청춘들에게 뒤지지 않을 만큼 특별한 추억을 남기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친구들과 함께 치앙마이로 여행을 떠났다.
여행 전 우리는 모두 카메라를 장만하고 촬영기법 강의까지 들어가며 온갖 법석을 떨었다. 실로 오랜만에 떠나는 여행이었다. 그곳에서 마주칠 모든 장면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싶었다. 새벽이면 아직 깨어나지 않은 이국의 거리를 바라보며 글도 쓰리라 마음먹었다. 유원지 하늘에 떠다니는 알록달록한 풍선 같은 마음을 한가득 품은 채 나는 여름의 나라로 둥둥 날아갔다.
첫 숙박지는 올드타운에 있었다. 이곳은 벽돌로 둘러싸인 동네였다. 구글맵으로 검색해 보면 거의 정사각형에 가까운 성벽을 해자가 둘러싸고 있는 형태가 한눈에 들어온다. 지도로 보는 것만으로도 비밀스럽고 특별한 무언가를 품고 있는 듯한 인상이어서 우리는 치앙마이에서의 첫 밤은 무조건 이곳으로 하자고 입을 모았다. 그리고 이왕이면 다양한 여행자가 모이는 게스트하우스에 묵으며 멀리 떠나온 기분을 만끽하기로 했다.
우리가 머문 곳은 정사각형 해자의 동쪽 변 근처에 있는 어느 호스텔이었다. 올드타운에서 가장 유명한 문, 타패게이트로 들어와 오른쪽에 흐르는 수로를 따라 북쪽으로 조금 걸어 올라오면 왼쪽에 다닥다닥 늘어선 상점가 무리에 슬그머니 자리하고 있는 게스트하우스. 자그마한 3층 건물로 된 호스텔은 1층이 로비였고 2층과 3층에 도미토리룸이 있었다. 내 키의 절반만 한 캐리어를 잠시 내려놓고 갈색 소파에 앉아 숨을 돌리고 있는데 어디선가 불쑥 호스텔 직원이 나타났다. 그는 열대지방 특유의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유창한 영어로 예약 내용을 확인하더니 우리를 2층으로 안내했다. 어둑한 계단을 올라가자 확 트인 전경을 자랑하는 널찍한 홀이 나타났다. 한 면에는 공용 샤워실과 화장실이, 나머지 삼면에는 숫자가 적힌 문들 너머로 객실이 있었다. 직원이 안내한 곳은 DORM(돔) 2라고 표시된 방이었다. 검정 틀 사이로 우윳빛 유리가 끼워진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니 천장까지 높게 뻗은 거대한 이층 침대가 양쪽 벽에 설치되어 있었다. 침대마다 제각각 사생활 보호를 위한 커튼이 걸려 있었고 침대 아래에는 자물쇠로 캐리어를 보관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정면으로 커다란 천창이 있었는데 대낮에도 잠을 자는 여행자를 배려해선지 암막 커튼이 쳐져 있었다. 천장에는 전등이 달랑 하나뿐이었다. 그마저도 침침해서 널찍한 공간을 밝히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였다. 게다가 침대에 달린 벽 조명도 호롱불처럼 약해서 객실은 전체적으로 어둑어둑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그야말로 잠을 자기 위한 용도로만 꾸며진 공간 같았다. 그래도 하룻밤 숙박비가 배달 치킨 가격보다 저렴했기에 그럭저럭 만족스러웠다. 베개와 이불이 조금 꿉꿉하고 어쩐지 어둠 곳곳에 도마뱀이 조용히 붙어 있을 것 같은 기분에 살짝 불안하긴 했지만.
객실과는 대조적으로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널찍한 거실은 무척 마음에 들었다. 길가로 난 발코니에는 창문 자체가 아예 없이 뻥 뚫려 있어서 올드타운의 바람과 소음이 마음껏 이곳을 드나들었다. 발코니를 따라 설치된 카운터 테이블 앞에 앉으면 유유히 흐르는 수로와 천변을 오가는 현지인들과 상기된 표정의 여행자들, 그리고 하얀 연기를 뿜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오토바이의 행렬을 감상할 수 있었다. 물론 무수히 이어진 전깃줄이 시야를 방해하긴 했지만, 여행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니 그마저도 마치 예술 조형물처럼 느껴졌다.
6시간 가까이 비행기를 타는 동안 기내식에다 이런저런 간식도 먹었는데 마치 단식이라도 한 듯 허기졌다. 우리는 대충 짐을 풀고 요기를 위해 숙소를 나섰다. 첫 태국 음식을 무엇으로 할지 구글맵을 살펴보다가 역시나 평점이 좋은 현지 식당을 발견했다. 숙소에서 도보로 십 분 거리였다. 구글맵의 친절하고 기계적인 안내에 따라 숙소 뒤편 골목으로 접어드니 소박한 간판을 단 식당들이 잇따라 시야에 나타났다. 입간판 앞을 서성이거나 식당 안 테이블에 앉아 메뉴판을 골똘히 들여다보고 있는 세계 곳곳의 여행자들. 삶을 유지하게 하는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면서도 반복되는 일상의 배경으로 곧잘 치부되곤 하는 음식이, 이 거리에서는 당당히 주인공이 되어 여행자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여러 차례 길을 잘못 든 끝에 겨우 목적지에 도착했다. 허름한 외관과 달리 식당 안에는 늦은 점심을 먹으러 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앳된 여직원의 손짓을 따라 어느 테이블에 자리 잡은 우리는 메뉴판을 가운데에 쫙 펼쳐놓고 뭘 먹을지 고민했다. 고지도를 들여다보는 탐험가처럼 어떤 보물 같은 맛이 숨겨져 있을지 메뉴 하나하나 사진과 설명을 꼼꼼히 읽어갔다. 여행지에서의 첫 끼는 그 맛과 냄새와 분위기가 기억에 강렬히 남기 마련이다. 훗날 치앙마이를 떠올렸을 때 머릿속에 영화의 첫 장면처럼 떠오를 이 순간을 실패한 맛의 경험으로 기록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나는 평소 좋아했던 태국 음식인 팟타이를 골랐다. 오징어나 새우 등 해산물도 사진상으로는 듬뿍 들어가 있고, 팟타이의 맛을 좌우하는 남쁠라(피시 소스)는 생선을 즐겨 먹지 않는 내 입맛에도 어쩐지 딱 맞았다. 게다가 면 요리는 웬만해선 맛이 없을 수 없으니까.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다른 테이블을 구경했다. 우리처럼 무리로 다니는 여행자보다 혼자 온 쪽이 더 많았다. 약 3주에 가까운 여행 기간 중 우리 역시 나흘쯤 각자의 방식으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올드타운에 처음 들어선 순간부터 나는 붉은 성벽에 둘러싸인 느긋한 이 동네가 마음에 쏙 들었고 혼자만의 시간도 이곳에서 보내리라 마음먹었다. 이름이 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겉보기에는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음식을 앞에 두고 부산히 젓가락을 움직이는 여행자들. 같이 온 일행은 없어도 맛있는 음식 한 접시만 있으면 여행자는 외롭지 않다. 일주일 뒤에는 나 역시 저들처럼 혼자 이런저런 식당이나 카페를 기웃거리겠지.
드디어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각종 해산물을 한데 넣고 볶은 쌀국수가 달콤한 향을 솔솔 풍기며 접시에 수북이 담겨 있었다. 스크램블 한 노란색 달걀이 접시의 하늘색과 잘 어울렸다. 바삭한 껍질을 뒤집어쓴 큼지막한 새우와 상큼한 과즙을 머금은 채 접시 한쪽에 슬그머니 자리 잡은 라임 한 조각. 후드득 흩뿌려지듯 장식된 땅콩 플레이크. 한국에서 먹을 때보다 훨씬 생생하고 강렬한 향신료의 맛이, 희멀건 설렁탕 국물에 시뻘건 섞박지 국물을 들이부을 때처럼 팟타이의 단맛과 신맛에 부스터 역할을 해주는 느낌이었다. 넓적한 면의 쫄깃한 식감 사이로 숙주나물이 발끈하듯 아삭아삭 소리를 내며 끼어들었고 이따금 땅콩이 게릴라처럼 급습하듯 고소한 맛을 터트리며 사라졌다. 강렬한 태양 아래 선명한 빛깔을 띤 채 이국적인 향취를 뿜어내는 태국의 풍경을 고스란히 재현해 낸 맛이었다.
정신없이 팟타이를 먹다가 고개를 드니 친구들 역시 접시에 코를 박고 태국의 맛을 느끼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이미 이곳 식당에서 각자의 여행이 시작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 먹고 있는 이 한 접시가 친구들에게는 어떤 맛과 냄새와 분위기로 각인될까. 여행이 막 시작되었는데, 그 기억이 궁금해진 나머지 나는 이 여정의 끝이 몹시도 기다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