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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지윤 Oct 21. 2023

놀람교향곡 같은 맛

파인애플 볶음밥

열흘 남짓의 나날을 함께 보낸 뒤 우리는 각자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 친구들과 돌아다녔던 올드타운과 님만해민, 반캉왓, 치앙라이 가운데 내 마음을 사로잡은 곳은 올드타운이었다. 하천을 중심으로 오래된 건물과 가게들이 수없이 늘어서 있고, 이른 아침이면 조깅을 즐기는 여행자들을 흔히 볼 수 있는 동네였다. 나는 1층에 맥도널드가 있는 한 호텔에 짐을 풀었다. 투숙객에게는 맥도널드 할인 서비스가 제공되어서 체크인하자마자 토네이도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세계 어느 곳에서든 친숙한 맛을 느낄 수 있다는 게 글로벌 체인 기업의 유일한 이점이 아닐까. 뜨거운 혀에 닿자마자 허무하게 사라져 버리는 달고 차가운 덩어리를 끊임없이 입안으로 가져가며 그런 생각을 했다.

저녁을 먹으려고 호텔에서 나와 올드타운을 걷다가 한 식당을 발견했다. 잠시 그 앞에 서서 구글맵으로 가게 정보를 검색했다. 채식 음식점이라는 설명과 함께 별 다섯 개가 붙은 리뷰가 여럿 달려 있었다. 어색한 문장으로 번역된 글을 읽는데 업로드된 사진 하나가 눈에 띄었다. 세로로 잘라 속을 파낸 파인애플 안에 상큼한 빛깔의 볶음밥이 가득 담겨 있었다. 바로 옆에는 노르스름한 튀김옷을 입은 버섯 튀김 한 접시. 리뷰를 등록한 이는 엄지 이모티콘과 함께 점과 선으로 타이핑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주저 없이 나는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벽을 따라 일렬로 늘어선 테이블 중 하나를 골라 철퍼덕 앉았다. 맞은편 벽에 등을 기댄 채 한 여행자가 포크로 샐러드를 찍어 먹고 있었다. 오랜만에 맛보는 음식이라도 되는 듯 신중하게 오물거리는 입을 바라보고 있자니 허기가 스콜처럼 쏟아져 내렸다. 곧이어 채소만 먹고 살아온 듯한 여자가 내게 다가왔다. 조각 얼음이 가득 담긴 물컵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여자가 주문하겠냐고 물었다. 나는 메뉴판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파인애플 볶음밥과 버섯 튀김을 달라고 했다.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서자 숨죽이고 있던 유리컵 속 얼음들이 톡톡 소리를 냈다. 열린 문 사이로 청량한 종소리가 들려왔다. 어느 사원에서 발산하는 소리일까. 요리가 나오길 기다리며 그 소리에 귀 기울였다. 뱃속은 밥을 달라고 아우성인데 눈앞에 흐르는 세상은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맞은편 여행자가 접시를 깨끗이 비우고 계산을 끝마쳤을 무렵 음식이 나왔다. 구글맵에 실려 있던 사진에서 바로 꺼내 온 듯한 비주얼이었다. 말끔히 속을 파낸 노란 껍데기 안에 여름의 빛깔만 골라 뒤섞어 놓은 것처럼 알록달록한 볶음밥이, 파인애플 속이 원래 자기 자리였다는 듯 담겨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접시에는 당근으로 만든 붉은 꽃과 푸른 상추로 장식된 버섯 튀김이 기름 냄새를 풍기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묵직한 냄새에 마음이 동한 나머지 먼저 버섯 튀김 하나를 집어 들었다. 공기로 튀긴 것처럼 사뿐한 그것을 한입 베어 물자 입안에서 소리 축제가 한판 벌어졌다. 바삭한 낙엽이 융단처럼 깔린 가로수길을 신나게 걸을 때 나는 소리였다. 숲을 머금은 버섯의 신선한 향이 뜨거운 기름에 그대로 튀겨져 버린 듯한 맛이 났다. 젓가락으로 집을 때는 분명 딱딱한 덩어리였는데 몇 번 씹기도 전에 스르르 녹으며 목구멍 너머로 사라지고 마는 맛. 이번에는 곁들어 나온 칠리소스에 찍어 먹어 보았다. 소스의 새콤달콤한 맛과 아삭바삭한 튀김의 식감이 혀 위에서 듀오 연주를 선보였다. 짤막하고 강렬한 연주를 끝으로 튀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입안에는 단맛이 길게 이어지는 파동처럼 여운을 남겼다. 열대지방의, 특히 건기에 만들어진 튀김은 건조한 공기도 한몫하는지 가을볕에 바짝 마른 단풍잎처럼 유난히 바스락거리는 느낌이었다. 건기에 열대지방으로 여행을 떠난다면 무조건 튀김을 먹으라고 권하고 싶어 졌달까.

정신없이 세 개째 튀김을 흡입하다가 가게 안에 손님이 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음악도 틀지 않은 고요한 실내에 울려 퍼지는 소리라곤 식성 좋은 어느 동양인 여자가 탐욕스럽게 내는 ‘아사삭’ ‘바사삭’뿐이었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나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내가 음식 먹는 소리도 신경 쓰였지만, 가장 큰 문제는 메인인 파인애플 볶음밥을 잊고 있었다는 것. 나는 초밥 뷔페나 고기 뷔페 같은 곳에 가면 어김없이 사이드 요리에 정신이 팔려서 결국 배가 부른 나머지 메인은 얼마 먹지도 못하고 나오는 사람이었다. 하마터면 이번에도 튀김을 다 먹고서 속이 느끼해져서 볶음밥의 맛을 즐기지 못할 뻔했다. 한 가지 음식을 공략하는 게 아니라면 나 같은 인간은 늘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는 걸 새삼 자각하며 숟가락을 들었다.

치앙마이에 와서 가장 적응이 되지 않았던 건 조용한 침입자처럼 벽에 붙어 있던 도마뱀도 아니었고, 주요 교통수단인 오토바이들이 맘껏 뿡뿡 대는 매캐한 매연도 아니었다. 당시 끼니마다 무조건 밥을 챙겨 먹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지고 있던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던 건 흩어지는 쌀알이었다. 집에서도 거의 떡에 가까울 만큼 찰기 있는 밥을 좋아했던 터라 한 숟가락 뜰 때부터 철천지원수처럼 서로 떨어지려는 안남미는 도통 입맛에 맞지 않았다. 공기를 빚어 만든 알갱이처럼 씹으면 허무하게 알알이 부서지는 느낌이라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래선지 치앙마이에 온 뒤로 돌아서면 허기가 졌다.

파인애플 볶음밥 역시 안남미로 만든 밥이었다. 냄새나 비주얼은 미친 듯이 식욕을 자극했지만, 숟가락으로 크게 한 스푼 떴을 때 각자도생하기 바쁜 밥알들 때문에 살짝 기대가 꺾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나는 볶음밥을 입에 넣고 천천히, 아까 샐러드를 먹던 여행자처럼 식재료의 맛을 하나하나 음미하듯 저작운동을 시작했다. 그 순간 입안에서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분주하게 흩어지는 날렵한 알갱이들 사이로 파인애플이 새콤한 즙을 뿜어내자, 밥알 하나하나의 단맛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게 아닌가. 서로 뭉치지 않으려는 그 습성 덕분에 알갱이 표면에 골고루 파인애플즙이 덧씌워져 경이로우리만치 새콤달콤한 맛을 자아내고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부조화가 이뤄낸 조화로운 맛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 찰지게 톡톡 터지는 옥수수의 식감은 심벌즈처럼 맛의 교향곡에 리듬감을 불어넣었다. 회사원 시절에 보러 갔던 클래식 공연에서는 웅장한 교향곡을 들으며 꾸벅꾸벅 졸기 바빴는데, 치앙마이의 어느 허름한 식당에 앉아 미각으로 느끼는 이 소박한 교향곡은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았다. 졸리기는커녕 잠자고 있던 감각까지도 깨울 만큼 활기 넘쳤다. 하이든의 놀람 교향곡 같은 맛이었다.

식당 밖으로는 파인애플 볶음밥의 맛에 버금가는 다채로운 장면들이 오가고 있었다. 달리는 기차 안에서 바라보는 차창 밖 풍경처럼 두 번 다시 재현될 일이 없는 순간의 장면들을, 부지런히 숟가락을 옮기는 틈틈이 구경했다. 거리를 걷다가 식당 안에 잠시 시선이 머무는 누군가에게도, 코끼리 바지를 입고 환한 얼굴로 파인애플 볶음밥을 먹고 있는 동양 여자의 존재가 한낱 스치는 장면에 지나지 않겠지. 여행지에서는 모든 순간이 그러하다. 방문한 적이 있는 곳이라 해도 다시 찾아갔을 때는 더 이상 예전의 그곳이 아니다. 음식도 마찬가지. 이미 아는 맛일지라도 다시 먹을 때마다 다른 맛이 난다. 음식을 먹을 때의 공기와 눈앞의 풍경, 주변에 존재하는 사물과 사람들의 온기에 따라 미묘하게 맛이 달라지는 법이다. 지금 먹고 있는 파인애플 볶음밥과 버섯 튀김의 맛을, 나는 이 풍경과 함께 기억하겠지.

먼저 자리를 뜬 여행자가 그러했듯 나는 밥알 한 톨 남기지 않고 파인애플 볶음밥을 먹어 치웠다. 채소를 닮은 여자가 그런 나를 바라보며 카운터에서 푸른 미소를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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