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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파링 Feb 19. 2021

의사 선생님, 저 안 괜찮다고 해주세요




아침에 한의원에 다녀왔다. 엄마와 동생들까지 넷이서 쫄로리 앉아 우리 차례가 되길 기다리다, 전부 다 들어오라는 말에 우르르 진찰실로 들어갔다. 키를 쟀는데 집에서 쟀을 때보다 2센티미터 작게 나와서 약간 실망... 했을 뿐 별 걱정도 기대도 없이 평온한 기분으로 의사 선생님 앞에 앉았다. 옷소매를 걷고 손목을 내민다. 의사 선생님이 맥을 짚으시더니 내 몸 상태를 조곤조곤 읊는다. "어디에 열이 많아서 이런 기능이 저하될 수 있는데 심각한 정도는 아니고요, 예전보다 소화 기능도 많이 좋아졌고, 스트레스도 별로 안 받는다고 나오네. 마음은 괜찮아요."


그 말을 듣는데 왜 '욱!'하고 기분이 나빴을까. 몸에 관한 진단들은 의심 없이 끄덕이며 들었는데 말이다. 뚱한 표정으로 집에 돌아오는 길에 계속 생각했다. 스스로 결론을 내려봤다. 그 진단은 내가 원하던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부정하고 싶었다.


나는 내 마음 상태가 건강하지 않으며 나 자신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느낄 때가 잦다. 하지만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거나 주변인에게 날 위로해달라고 부탁하는 일이 어려워서 미루기 일쑤다. 그저 누군가가 먼저 내가 잘 지내는지 물어봐주고, 날 달래주고, 나에게 딱 맞는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해주기를 꼼짝 않고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슬퍼지고... 말도 안 되는 욕심이란 걸 깨닫는다. 그렇게 꽁꽁 묻어둔 마음을 한의사 선생님이 몰라주자 서운함이 고개를 내민 것이다. '나 안 괜찮은데 왜 아무것도 모르면서 괜찮다고 해!?'라며 (속으로) 씩씩댔다. 사실 아침의 서운함은 오랫동안 쌓아온 찌질한 서운함이다. 의사 선생님이 아니라 내 주변인 - 같이 한의원에 간 엄마라든가. 의사 선생님이 내가 안 괜찮은 상태라고 말한다면 진단을 들은 엄마가 날 걱정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나 보다 - 을 향한 것이었고, 실은 결국 나에게 향해야 하는 것이다. 참 유치한 마음이지만, 돌고 돌아 돌아온 나의 찌질하고 유치하고 약한 이 마음을 내치지 않고 받아들여보기로 했다. 너... 의사 선생님이 안 괜찮다고 해주길 바랐구나? 떼잉 쯧...!






"너 힘든 얘기 주변 사람들한테 잘 안 하지." 최근 두어 번 들은 말이다. 몰라서 묻는 게 아니라 알면서 확인차 건네는 질문. 그럼 나는 또 그 답에 동의하면서도 굳이 되묻는다. "그런가?"라고.


나는 SNS 중독이다. 트위터와 인스타그램 부계정에 하도 자잘한 생각과 감정들을 필터링 없이 떠들어서인지, 내가 힘들다는 얘기를 잘 못 하는 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웠다. 양심상 인정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우울하고 짜증 날 때마다 힘들다는 게시물을 올리면서 무슨... 오히려 자제해야 하는 거 아닌가...' 곧 무언가 깨달았다. 나는 개인의 힘듦을 타인에게 털어놓는 행위를 '나쁜 것'이라 여기고 있다는 걸. 좋은 것과 나쁜 것이라는 너무 단순한 이분법을 사용하고 싶진 않지만 더 나은 단어를 못 찾았다.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일까.


나는 어렸을 때부터 놀다가 우는 아이들을 참 싫어했다. 쉽게 토라지는 아이들도, 갖고 싶은 걸 사달라고 조르고 떼쓰는 아이들도 싫었다. 놀다가 다칠 수도 있고 마음 상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는 건데, 울음으로써 즐겁던 분위기를 망치고 모두의 걱정과 관심을 가져가 버린다는 게 좀 꼴 보기 싫었다. 약간은 한심했고, 약간은 미웠고, 나는 한심하거나 미운 아이가 되기 싫으니까 저러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했다. 배운 바에 의하면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행동은 애 같은 행동이었다. 난 꼬마였지만 어른스러운 아이이고 싶었다. 그리고 배운 바에 의하면 그런 행동은, 특히 툭하면 우는 짓은 여자애 같은 행동이었다. 난 여자였지만 남자애 같은 여자애이고 싶었다.


약한 건 나쁜 게 아니다. 이걸 자꾸 까먹는다. 내 성격 탓도 있고 세상 탓도 있다. 우리가 사는 곳에는 약한 건 나쁘다는 시선을 내면화하도록 강요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 꼬마 여자아이였던 내가 꼬마는 약하니까 나쁘고 여자는 약하니까 나쁘다는 판단을 나도 모르게 했다는 것이 증거이다. 나는 그냥 나였을 뿐인데 애 같거나 어른스럽거나 둘 중 하나, 여자애답거나 남자애 같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는 것이 증거이다. 그러니 또다시 나 스스로 내 정체성을 부정하도록 만드는 세상의 계략에 속아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의식하고 사고방식을 씻어내야 한다. 샤워를 해야겠다.


주변 사람들에게 부담이 되기 싫은 마음도 크다.


상대가 아무리 친한 친구여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 해도 타인의 힘든 이야기를 들어주고 아픔에 공감해주는 일은 어렵다. 에너지가 많이 든다. 나는 이제 꼬마가 아니지만 여전히 예민한 감정을 일상적으로 드러내는 이들을 불편해한다. 누군가 내게 고민을 털어놓을 때면 마음이 작동해야 하는데 머리만 굴러간다. 어떻게 대답해주는 게 정답일지. 어떻게 반응해야 내가 지금 당신을 위로하고 싶어 하고 있다는 사실을 오해 없이 전달할 수 있을지. 대화는 퀴즈쇼가 아닌데 종종 이런 계산을 한다. 내 말이 진심인 건지 나조차도 헷갈려하다가 결국 공허해진다. 막상 털어놓고 싶은 고민을 가진 입장이 되면 누가 내 얘기를 중간에 끊거나 반박하지 않고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확실히 나아지는데, 듣는 입장이 되면 꼭 대단한 도움이 되어야 할 것 같다는 강박과 욕망 언저리의 무언가가 날 조종한다. 답답~하다. 


그래서 내가 타자를 필요로 할 때에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게 된다. 다들 힘든 건 마찬가지일 텐데, 내 이야기를 들어달라며 친구의 시간과 에너지를 뺏는 건 이기적인 것 같다. 하지만 친구들이 내게 고민을 털어놓았을 때를 좀 더 자세히 떠올려보면, 분명히 어렵고 또 가끔은 불편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내가 원해서 들었고 공감했고 반응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상대와 내가 연결되어 있다는 안정감과 따뜻함을 되려 내가 얻을 때도 있었다. 어쩌면 내가 주저하는 데에는 과한 불안에서 오는 불신이 한몫을 한다. 나의 얘기를 들어주는 데에 기꺼이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내어줄 사람은 없을 거라는 비관을 우선 관두자. 딱히 내가 뛰어나게 착하고 배려심 많은 사람이라서 친구의 얘기를 듣는 데에 시간과 에너지를 쓰는 건 아니니까. 어려움과 불편함과 부담을 감내할 만큼 그들이 나에게 소중한 거니까. 이정도 어려움과 불편함과 부담을 감내할 만큼 나 역시 그들에게 소중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불똥 튀겨대지 말자. 의사 선생님이 대신 나 안 괜찮다고 말해주길 바라지 말자. 왠지 모를 반항심에 '내가 괜찮은지 안 괜찮은지는 내가 제일 잘 알아!'라고 당당하게 (속으로) 외쳤던 기세를 가지고, 안 괜찮다고 말할 용기를 조금씩 가져보려고 한다. 이번처럼 괜히 한의원 같은 곳에다 화내지 말고...




커버 이미지 @Unsplash

제가 갔던 병원과 관련 없는 사진입니다.


모순적이게도 안 괜찮다고 말할 용기에는 괜찮다고 말할 용기가 세트로 붙어있는 것 같다. 내가 항상 힘들어야지만 누군가가 먼저 내가 잘 지내는지 물어봐주고, 날 달래주고, 나에게 딱 맞는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해줄 확률이 조금이나마 높을 것이란 기대 때문에 내가 밤마다 우울을 찾는 걸지도 모르겠다. 괜찮을 땐 괜찮아보자. 괜찮을 때의 나도 관심받고 사랑받을만한 사람이다...라고 주문을 걸어보는 새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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