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없어도 용기 넘쳤던 시절과 철밥통에 대한 고찰
만만하게 보였던 것이 사실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는가를 깨닫기 시작한다.
물론 나도 어렸을 땐 온갖 잘난척 다 했기에 하는 말이다.
중고등학교땐, 난 진짜 정말 못해도 IMF 총재 정도는 할 줄 알았다. 의대 가는 애들 보고 마구 비웃었다. 아아 정말 쪼잔해. 찌질하게 월급 좀 많이 받는 거 하고 싶었쩌요?? 잘난척 해봐야 결국 아픈 사람들 시중드는 거잖아라면서. 의사를 그렇게 깔봤으니 다른 직업이 눈에 들어왔을리가. 회계사는, 그나마 의대갈 실력도 안 되는 애들이 하는 거고, 사업 해서 돈 버는 건, 세상에 얼마나 할 일이 많은데 그거 몇 푼씩 받아서 결국 혼자 잘 먹고 잘 사겠다는 거잖아... 라고 깔봤다. 세상을 바꿔야지!! 남북통일 후에 어떻게 한 나라를 재건할 건지, 뭐 그런 고민을 해야지!! 빈부 격차를 줄이던지, 아인슈타인이 풀지 못한 Unified 이론을 풀던가 뭐 그런!! 찌질하게 의대.. 에휴.
하버드 장렬하게 떨어지고
아프리카 대학 대강대강 들어가서, 현실 받아들이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스물 일곱에야 정신차리고 아이구 그래도 먹고 살 건 IT 밖에 없구나.. 라고 확 정신들었다.
이제 삼십대 중반.
10대의 내가 봤으면 찌질하기를 견딜 수 없는 직장인.
20대의 내가 봤어도 좀 찌질한, 현실 안주 직장인.
20대 초반이었으면, 지금 내 경험 있었음 이 세계 IT 패러다임을 바꿔놓겠다고 설쳤을 이력서이긴 한데.
지금은 솔직히 그렇다. 대강 잘번다. 그냥 월급 받고 다니는 직장인으로 볼 때 편하게 대우받고 잘 다닌다. 신랑과 합치면 더욱더 그렇다. 그렇지만 이게 철밥통일까?
성인이 되고도 10년이 넘게 지나니까, 20대에 그렇게 잘 나가 보였던 사람들중에 몇 퍼센트가 10년 후에도 잘 나가는지를 보면 겸허해질 수 밖에 없다. 장사 해서 대박쳤다던 사람, 5년 후에 망했다. 엄청나게 공부 잘해서 대학 간 애, 전공 바꿔서 흐지부지 되더니 결국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다. 엄청 취업 잘 해서 너무 부럽던 친구, 아직도 그 회사 계속 있는 거 같던데, 뭐 꼭 잘 나가는지는 모르겠다. 병 걸린 사람들도 있고, 죽은 사람들도 있다. 죽는다 죽는다 하다가 어떻게 잘 풀린 사람들도 당연히 있지만, 무슨 기술 유행할때 떼돈 벌던 사람, 요새는 그렇게 못 받는다. 예전에는 한심해 보이던 전공이 요즘엔 또 잘 나간다.
나 역시 여기에 포함될 가능성이 크다. 지금 당장 취업 쉽고 잘 번다고 해서 얼마 갈지 모르는 것. 다른 종목이 뜨기 시작하고, 어쩌다가 내 종목은 확 재미 없어졌는데 애들 교육에 돈 들어갈 때 되면, "뭐야 다시 공부하면 될 거 아냐??" 라고 간단하게 말하는 이십대 초반 애들 한 대 쥐어박고 싶겠지.
물론 계속 잘 사는 사람들도 있다. 몇백억 부자들이야 뭐 경기 탈 일 없겠지. 그러나 40대, 50대, 연령층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내가 예전에는 말이야..." 하는 사람들이 늘어간다. 여기에 나도 포함되는 건 어디까지나 시간 문제.
세상에서 제일 찌질하게 보였던 결혼과 육아. 여자라고 해서 거기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애 낳고 살림 살아도 난 구질구질하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요즘엔 둘째가 똥싸서 옷에 비벼놓으면, 장갑 빨리 못찾으면 맨손으로 빨래한다 ㅋㅋ 한 번은 둘째가 녹색물을 토하는데 놀래서 뭔지 먹어본 적도 있다 (물감인가 뭔가 했는데 알고 보니 스피룰리나 알약;;) 아이 낳고 나니까, 오줌 마려울때 줄넘기 하면 오줌 샐 때도 있다 ㅋㅋㅋ 난 십대때 요실금이 뭔가를 발견하고, 와 정말 그정도 되면 그냥 자살할거라고 믿었다.
사실 지금 역시 의대 안/못간건 후회 안 한다만, 그래도 의대 과정 다 끝낸 사람들 존경한다. 아무나 하는 거 아니더라. 개나소나 다 할 거 같던 회계사/변호사. 그거 15년 20년 버텨서 파트너 다는 거, 진짜 정말 대단한 일이더라. 얼굴 없는 대기업 직원?? 들어가는게 얼마나 힘든데. 버티는 건 또 얼마나 미칠듯이 일상적이라 너무나도 구질구질하게 봤던 것들 - 빨래. 요리. 육아. 출퇴근. 생활비 걱정. 청소. 공과금 내기. 그래, 사람 사는데 이런 거 정말 필요하더라.
좋은 거라면, 어릴 때엔 감사할 건 별로 없고 요구사항만 많았던 거 같은데, 지금은 하나하나 감사하다. 이빨 큰 문제 없는 것도 감사하고 (중학생의 나라면 이 정도에서 찌질함에 기절), 가족 건강 큰 문제 없는 거 감사. 그런데 자신감은 줄었다. 세상 안 바꿔도 되니까, 앞으로 십년 정도만 데이터 거품 안 꺼져서 돈 벌어놓을 수 있음 좋겠다. 애들한테 최고 교육 뭐 이런 건 안 바라고, 그냥 괜찮은 공립학교 보낼 수 있음 좋겠다.
다 그냥 그렇게 산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세상에 나를 맞춰가면서, 추상적으로만 무시했던 것을 몸으로 배워가면서, 내가 가진 것에 감사하고 못 가진 것은 포기해가면서. 비슷비슷하게 산다. 그만큼 살아가는 것도 버겁다.
그리고 이젠 웃는다. 우리 아들이 자기는 커서 세상에서 제일 큰 기차를 만들거라고 하면 그래그래 맞장구 치고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