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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gpa Dec 31. 2017

보면 볼수록, 알면 알 수록, 더 불행해지기도 한다

2016년 9월 25일

80년대 얘긴데, 그땐 바나나가 귀했다. 제사 지낼 때 어쩌다가 한 번 맛봤던 걸로 기억한다. 참치도 귀했다. 고기도 무척 귀했다. 내 주위에 '호텔'이란 곳에 가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고, '해외여행' 이런 건 텔레비전에 나오는 부잣집 사람들이 하는 거였다.


그랬던 내가 무려 외국으로 이민을 간다고 하니 얼마나 들떴을까. 외국 애들하고 학교를 같이 다녀!! 물론 미국이나 캐나다 가는 것처럼 폼나지는 않는 남아공이지만 그래도!!     

그 후에도 90년대 중반까지 해외라고는 그냥 남아공, 한국, 그리고 중간에 경유하는 홍콩 정도밖에 못 갔으나 비행기 탈 때마다 보딩패스 꼭 모아서 스크랩북에 넣고 그랬다. 면세점에서 모르는 브랜드의 고급스러운 물건 보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워서 공항 구석에 앉아 노트에 뭐라뭐라 많이 적었다. 누가 날 봐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자의식 과잉 덩어리로 ㅋㅋ     

시간이 흐르고 흘러 난 30대 후반이 됐다. 세상에서 제일 싫은 일 탑 10에 히스로 공항 가는 게 포함된다. 도대체 어떤 미친놈들이 지내나 했던 호텔도 너무 자주 드나 들어서, 어릴 적처럼 감상적으로 호텔 명함 모으고 그러진 않는다. 이번 보딩패스는 씹던 껌 싸서 버렸다. 백화점 이런 데서 누가 옷을 사나 했는데, 이젠 나도 가끔가다 세일하는 거 살 때 있다. 어릴 땐 외식이라면 어디 가서 돈가스 먹는 연례행사였는데, 요즘엔 누구든 참 종류별로 식당 많이 다닌다.  

   

없이 자랄 때는 내가 없다는 걸 잘 몰랐다. 다 나와 비슷비슷한 사람들이 많았고, 잘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알아도 직접 피부에 와 닿을 일이 별로 없었다. 남아공 역시 못 사는 나라고 백인 지역에 살면서 인종차별 그리 겪지 않았다. 다들 고만고만했고, 주위에는 나보다 못사는 사람들이 널려있었다.     

세상이 변해서, 이제는 정말 많이 보고 겪는다. 킴 카다시안은 뭘 입고 뭘 먹고 뭘 하고 다니는지 아주 쉽게 알 수 있다. 세상에 얼마나 좋은 관광지가 많은지도 5초 만에 볼 수 있고, 페이스북에는 여행 다니는 사람들, 맛집 다니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예전에는 부자들만 누릴 수 있던 것을, 이제는 작은 돈으로도 잠깐씩은 누릴 수 있다. 샤넬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있다가, 이제는 샤넬 립스틱이라도 살 수 있다. 예전엔 전자시계만 껴도 최고였는데 요즘에는 몇천만 원, 몇억짜리 시계 광고도 흔하고 아는 사람들도 많고, 끼고 다니는 사람들도 많다. 호텔 패키지 저렴하게 나온 거 사면 얼마 안 되는 돈으로 특급 호텔 누릴 수도 있다. 저렴한 가격으로 해외여행도 쉬워졌다.     

그게 우리를 더 행복하게 하느냐 하면, 그건 잘 모르겠다. 작은 사치가 가능하면서, 오히려 그 사치를 늘 누리지 못할 때 더 상실감이 크다. 너무나도 쉽게 접할 수 있는, 나보다 나은 이들의 삶이 쉴 새 없이 눈앞에 디밀어지면서 훨씬 더 힘들다. 우리 반 누구도 여권 없을 때는 아무리 해외여행 뭐 어쩌고 봐도 하나도 꿀리지 않다가, 어느 날 갑자기 친구들 모임에서 유럽 여행 얘기 나오고 다들 당연한 듯 자신의 여행 얘기하면 숨쉬기가 조금 답답해진다. 내가 남아공에서 그랬다. 영국이 어떻고 프랑스가 어떻고 해서 난 한 번도 못 가봐서 모르겠다 웃으며 대답하니 "아 별거 없어"라며 위로식으로 답하더라. 텔레비전에서 아무리 봐도 뭐 그냥 그런가 했지만, 내 앞의 친구 둘이 유럽 얘기하니까 얘기 내용은 하나도 안 들어오더라. 난 못 가봤는데. 너넨 가봤구나. 난 언제 가보나. 너넨 그런데 가는 게 무지 자연스럽고 별거 아니구나. 난 그 별거 아닌 것도 못 해봤는데. 그 생각만 머리에 가득차서.     

내가 어릴 땐 가보지도 못했던 호텔들에 요즘 사람들은 소셜 쿠폰이다 뭐다 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갈 수 있고, 난 꿈꾸지도 못했던 식당에도 한 끼 먹을 만큼은 다 갈 수 있고, 싼 해외여행도 할 수 있고 하지만, 그래도 상실감은 훨씬 더 크다고 생각한다. 보면 볼수록, 알면 알 수록, 더 불행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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