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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gpa Dec 31. 2017

내 결혼 이야기

2016년 9월 26일

 스물둘에 프러포즈 받아서 스물셋에 결혼했다. 고등학교 동창 중 결혼 제일 늦게 할 거 같은 사람하면 나였는데 왜 그렇게 일찍 결혼했냐면, 엄마아빠한테 혼날까 봐 그랬다. 난 무지하게 사회 체제에 삐딱한 반항아였으므로 결혼 제도 같은 거 우습게 봤다. 

남편 만나서 사귀게 되었는데 두 주 만에 프러포즈 받아서 야 너 정신이 나갔냐 내가 나이가 몇인데 결혼은 무슨 결혼! 이라고 호통을 쳤다. (긴 얘기지만 줄여서) 내가 방 구할 때 남편이 소개해준 방이 아주 남편에게 편리하게도 자신 역시 지내고 있는 집이었고, 둘이 사귀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내 방보다 남편 뒤채에 더 시간을 자주 보내게 되었고, 좀 좁다 싶어서 그냥 아파트 하나 얻어서 나가자 결정하고 옮긴 지 두 달 만에 엄마 아버지가 새집 보러 오신다 하셨다. 내가 아무리 그때 개썅마이웨이 벌써 3~4년 차에 직장 다니면서 돈도 벌었지만 부산 출신 부모님 성깔 모르는 거 아니고, 잡히면 최소 삭발이겠다 싶더라. 그래서 결혼한다고 선수 쳤다. 덕분에 동거 문제는 그냥저냥 넘어갔다. 부모님은 결혼 반대하셨지만 난 그냥 구청 가서 결혼 신고한다고 했고(원래 더 큰 일을 벌려 놓으면 작은 일은 혼 안 나잖소 - 결혼하겠다는데 동거 가지고 혼내겠소?), 엄마는 의외로 그렇게 결혼할 거면 결혼식을 하라고 했다 (읭?). 난 결혼식 같은 거 관심 없으니 엄마가 꼭 하고 싶으면 하시라고, 난 참견 안 할 테니 마음대로 하시고 난 참여하겠다고 (...) 통보했다. 그렇다. 난 간이 큰 딸이었다.     


그렇게 결혼해서 지금 14년 차인데, 한 번도 안 싸우고 잘살고 있다. 오늘 허핑턴에서 결혼/이혼에 대한 글을 보고 문득 생각나서 남편에게 물었다. 당신에겐 결혼이 뭐야? 남편은 잠시 내 눈치 살피더니 (...) 대답했다. "Legal arrangement?" 난 "그치??" 라고 대답했고, 남편은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너 답지 않은 질문이라 혹시 함정질문인가 잠깐 긴장했네."     


그 때도 그렇고 애 둘 낳고 사는 지금까지, 나에게 결혼은 두 사람이 함께 사는 방법의 수많은 버전 중에 하나이다. 법적 계약이기도 하다. 쉽게 떠나지 못하게 묶는 의도도 있을 거고, 헤어질 경우에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확실히 해두는 의미도 있다. 여기에서 사랑이나 헌신 뭐 그런 건 갖다 붙이는 사람들의 선택이지, 결혼 자체는 그 어떤 의미도 없다. 있다면 우리가 부여하는 의미만큼 있겠지. 남편을 사랑하냐고 묻는다면 뭐 당연. 그게 결혼 때문이냐고 하면 아니 그건 아니고. 결혼이라는 제도를 선택한 것이 좋았냐 묻는다면, 나에게는 그렇다고 하겠다. 하지만 아이들이 없었다면 또 다를 것 같기도 하다. 스물셋의 나도, 서른일곱의 나도, 결혼은 사랑의 증표나 헌신의 약속보다는 나와 잘 맞는 사람과 안정적으로 삶을 계획할 수 있도록 어느 정도 법적 구속력을 가지는, 같이 있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주변 사람들이 제일 안 귀찮게 하고 질문 없는 방법이라고나. 쿨럭;;     

결혼에 의미가 있어서 결혼을 하는 게 아니라, 삶을 같이할 수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를 묶어놓을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다 보니 보편적으로 생긴 제도가 결혼제도다. 같이 있고 싶다가 먼저고, 제도화가 다음이다. 그 제도가 보편화 되고 그 제도로 인한 삶의 패턴도 잘 알려지면서부터 앞뒤가 바뀌기도 한다. 나를 많이 사랑하면 결혼하고 싶어 할 테니, 남자가 결혼을 신청하면 나에 대한 사랑의 증표로 받아들인다. 아니죠. 결혼의 제도만 따른다고 해서 사랑은 아닌 거니까. 또 사랑해서 결혼했더라도 사랑이 끝날 수도 있는 거고.     


진정한 페미니즘 어쩌고 하는 것도 앞뒤가 잘못되었다. 개개인이 가부장제도에 반항하면서 싸우고, 그러면서 동지를 찾고, 그러면서 학문적인 연구와 토론도 하고, 그러면서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이 주어진 거지 페미니즘이 먼저 생기고 그다음에 여자들이 깨달음을 얻고 싸운 건 아니잖소. 개개인의 투쟁과, 그게 거시화 되는 사회적 현상과, 그에 대한 분석 및 학문적인 연구가 동시에 일어날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다. 보통은 현상이 먼저 있고, 그에 대한 이름 붙이기가 다음이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같이 있고 싶다는 욕구가 먼저 있고, 그것을 제도화하는 것이 그다음이듯이. 이것저것 다 읽고 공부해서 아 이게 잘못됐구나. 느껴서 데모하는 사람도 있고, 아 여자로 사는 거 진짜 거지 같다 싶어서 투쟁하는 사람도 있고. 제목은 상관없다. 이름이야 어찌 됐든, 불공평함을 느끼고 그것을 없애고자 싸우겠다는 현상이 먼저다.  

   

다시 결혼 얘기로 돌아가서. 이혼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 사람은 사랑하는 어떤 남자를 만나서, 그 남자와 같이 있을 수 있는 방법 중에 결혼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리고 좋을 때도 있었겠고 나쁠 때도 있었겠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관계의 성향이 변하자 그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 중에 이혼을 선택했을 거다. 다른 누군가는 비슷한 상황에서 사랑하는 관계는 아니지만 그래도 법적 구속력은 지속하는 방법으로 결혼을 유지했을 수도 있겠다. 어떤 옵션을 택하든지 그건 그 사람 선택이다. 사랑하는 방법도 수십 수백 가지고, 끝내는 방법도 수십 수백 가지며, 그건 또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서, 혹은 상황이 어떠냐에 따라서도 달라질 수 있겠다. 그리고 어떤 상황이든 그 기본은 사람이다. 제도가 아니다. 또 다른 인연을 만날 수 있겠지. 그리고 그 사람과 사랑에 빠지면, 그 사람과 같이 있을 수 있는 삶의 방법 여러 가지 중 하나를 택하겠지. 그러나 어찌 됐든 none of your business.     

사람이, 그 사람이 느끼는 감정이, 그 사람이 있는 상황이 먼저고, 라벨 붙이기는 그 다음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 먼저 얘기하지 않는 이상, 그 사람을, 그 사람의 감정을, 그 사람의 사정과 환경을 모르고 라벨부터 들고 패는 건 하지 말자. 왜 결혼 안 하냐, 왜 이혼했냐, 다시 결혼할 거냐 등등. 진정한 결혼은 이런 거고, 의미는 저런 거고 이런 고나리질도 노노. 어련히 알아서 하겠소.     


덧: 

허핑턴 기사는 여기 -

http://www.huffingtonpost.kr/seohee-lee/story_b_11647836.html

가끔가다 난 절대로 이런 글 못 쓴다 생각하게 하는 분들 보는데, 이서희님이 그렇다. 글쓰기 수준도 그렇지만, 난 내가 공대생 맞긴 맞구나 느낄 때가 이런 분 글 볼 때. 넘사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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