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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gpa Dec 31. 2017

두고 보면 생긴 대로 살더라

2016년 9월 26일


결국 두고 보면 생긴 대로 살더라. 좋게 보면 좋은 점도 있고, 나쁘게 보면 나쁜 점도 있다.     

난 포기가 빠르고 질투가 거의 없다. 취향은 인문계일지 몰라도 사고회로는 무섭게 공대공대하며, 큰 감정의 동요가 없어 주제 파악도 잘 한다. 


내 결혼 얘기를 예로 들어보자.     


1-1) 내가 정말 원하는 결혼식이 뭔지를 찾아내어 완벽하고 퐌타스틱한 결혼식을 돈과 시간을 들여 계획함. 

1-2) 아 뭐 결혼식이래 봤자 길어봐야 한나절인데 그거 좋자고 그 많은 시간과 돈과 스트레스를 투자해야 되겠소? 어차피 완벽은 없고, 돌아보면 다 촌스러울 거고, 주위 사람 피곤해지는데 그냥 그 한나절 그냥저냥 하고, 그 노력과 시간과 돈으로 먹고살 걱정/공부나 한다. 아님 발 씻고 미드나 보던가.     


난 1-2를 택한다.     


다음. 매일 아침 출근 전.     


1-1) 머리 드라이하고 예쁘게 화장하고 옷을 곱게 차려입고 나간다. 

1-2) 뭐 누가 보겠냐. 그냥 지나가는 행인 15342 얼굴인데 그냥 대강 하고 나가자.     


여기서도 물론 2다. 


그렇다면 사람 만날 때는?     


1-1) 내가 얼마나 똑똑하고 유식한지를 어필하려 노력한다. 

1-2) 기억력도 나쁜 주제에 유지 못 할/책임 못 질 잘난 척은 하지 않는다.     


말 안 해도 아시리라 믿는다. 난 인간이 좀 이렇다. 게다가 난 내 자신의 스탯 모니터링이 기막히게 잘 되는 사람이다. 하기 싫다던가, 몸이 피곤하다던가, 이런 건 아주 잘 알고 대책 미리 세운다. 그래서 애 키울 때도 아주 힘들 정도로 자신을 혹사 안 시켰다. 내가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 아주 잘 알고, 미리미리 사람을 쓰든가 직장에 약 쳐 놓던가 집안 청결을 좀 포기하든가 한다.     


친구들이 나에 대해서 가끔 부러워하는 점은 주위 사람에 대한 무신경 내지 포기다. 누군가가 나를 안 좋게 생각한다는 건 뭐 거의 피할 수 없는 확실성이고, 그 사람의 사고를 내가 바꿀 가능성도 없다. 그래서 신경도 덜 쓰고 잘 보이려 노력도 별로 안 한다. 더 이상 교회는 안 다니지만 그래도 내 마음속에 남아있는 성경 말씀 중에, 걱정한다고 머리카락이 더 자라냐 그런 말 있었다. 내가 혼자 곰씹는다고 해서 상대방이 나를 더 좋게 볼 거 아니고, 내가 뭐 어찌할 수 없는 거니까 그냥 포기. 내 욕을 한 대도 그런가보다 한다. 어차피 기억력 모자라서 잠깐 눈 돌리면 잊는다. 댓글 안 좋은 거 받아도 몇 분, 몇 시간, 최대 며칠 지나면 잊어버린다.     


똑같은 성격이 반대로 안 좋은 점은 - 내 깜냥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서 미리미리 포기하는 성향이 여러 군데 나타난다. 전화 잘 안 하는 스타일이라 남이 나에게 연락 안 하는 것에도 섭섭해 하지 않으나, 그런 식으로 멀어지는 친구도 있다. 댓글은 감사하지만 대댓글 하나하나 다 다는 건 내가 감당 못 할 거 아니까 그냥 포기. 그래서 좋은 인연도 잘 못 만든다. 집도 대강대강 하고 살다 보니 늘 엉망이고 정돈이 안 되어 있다. 뭐 누가 날 신경 쓰겠냐 하고 허접하게 다니니 정말 허접한 취급 받는다 (...). 아니 세탁기를 사러 가도 왜 비싼 모델은 안 보여주는 거임?? 왜 세일 제품만 자꾸 들이미는 거야??     


그래서 얼마 전부터 조금씩 바꾸기 시작했다. 빨기 쉽고 안 다려도 되는 옷 위주로 입다 보니 면티에 청바지/레깅스가 주메뉴였는데, 손빨래해야 하는 옷도 입기 시작했다. 머리 감고 나서 빗지도 않고 출근할 때 많았으나 이젠 그래도 빗고 말리고 드라이...까지는 안 가지만 뭐 어쨌든 조금은 볼륨 살리려 노력해본다. 신발도 운동화만 주구장창 신지 않고 약간 힐도 신고, 부엌 청소도 깔끔하게 하려고 노력한다. 뭐 그냥저냥 살아도 되는 거 아는데, 평생을 그리 살아왔더니 인간이 그냥저냥 그렇게 되더라. 내 삶의 구호가 in the grand scheme of things, it doesn't really matter - 뭐 사는 게 별거 있냐. 크게 보면 별거 아닌 작은 거 가지고 스트레스받지 말자... 였는데, 스트레스 너무 안 받고 다 무시하고 사니까 인간이 그 모냥 그 꼴이 되더라니까.     

그래서 아침마다 이제는 it does matter 라고 한다. 일어나서 침대 이불 정리하고 (...제가 이 수준입니다), 옷도 조금 더 차려입고, 사무실 책상도 좀 정리하고, 부엌 바닥도 좀 더 자주 닦고, 화장실 샤워 유리 석회 낀 것도 좀 자주자주 지우고, 애들 음식도 조금 더 신경 쓰고 등등. 삶을 대할 때 예의 좀 갖추자고.     

꼭 따지면 그럴 필요 없는 거 아는데, 투자 대비 이득은 없는 거 알아도, 그래도 너무 생긴 대로만 살다 가기 좀 뭐 하잖소.     


그래서 오늘도 다시 다짐. 


It does matter. Every little bit helps


아 이건 테스코 구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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