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angpa May 28. 2018

처음으로 느낀 안도감

2015년 11월 28일

어렸을 때 부모님이 망했다. 

그래서 고등학교 마지막 2년은 학비도 못 냈고, 집안 살림은 우리에게 돈 빌려준 사람들이 들어내 갔고 난 고3 때 세일즈 뛰고 경찰서 왔다 갔다 하고 뭐 그랬다. 구질구질한 얘기 길고 할많하않.

좀 덤덤한 성격이라 딱히 상처받았다든가 서러웠다든가 그런 건 없었지만, 와 돈 없으면 새 되는구나...는 아주 확실하게 배웠다.

만약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난 정말 인류학이나 사학 전공했을지 모르고, 글 써서 먹고 살겠다고 좀 더 버텼을지 모르겠다(아, 신랑도 마찬가지다. 집안 쫄딱 망해서 그림 그리는 거 좋아했지만 미대 간다든지, 그림으로 돈 벌어보겠다는 발랄한 꿈은 가져 본 적도 없다).


그 후로 20년이 지나서.

나 잘 번다. 신랑도 잘 번다. 얼마나 잘 버냐고 물어보면 한국 기준으로 말하기 쪽팔릴 정도로, 어디 가서 돈 없다고 궁상떨면 쳐맞을 정도로 잘 번다. 그래 봤자 월급쟁이긴 한데, 병원 같은 거 운영하는 거 아니고 자영업 아닌 사람이 높은 자리 꿰차지 않고 그럭저럭 주말 챙겨가며 심리적 무리 전혀 없이 널널하게 벌 수 있는 직종에서 이 이상 더 벌기는 힘들 거다.

그래도 난 지금까지 충분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고, 이제는 벌었으니 좀 쓰고 살자는 생각도 못 했다. 언제 망할지 모르기 때문에, 언제 무슨 일이 있어서 일 못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최대한으로 아끼고 살았다. 아 뭐 내 주위 엔지니어들도 비슷한 사람이 많아서 꼭 어렸을 때 부모님 부도 때문이 아닐지도 모르겠으나 어쨌든, 두 사람 월급의 반 이상은 꼭꼭 저축하고 살았다.


그래서 런던에 집 한 다섯 채 사놓으면 마음이 놓일까 했었는데.

며칠 전에 연금 계산을 해봤다. 세금 혜택이 어마어마하고, 신랑님 나이가 있다 보니까 55세면 연금에서 돈을 뺄 수 있다고 할 때 십 몇 년 만 부으면 된다. 적금 넣는 셈 치면, 상당히 세다. 어느 정도냐면 10만원 넣으면 60만원이 되는 기적이 일어난다. (간단히 말해: 세후 10만원 넣음 -> 회사에서 40만원 넣어줌 -> 정부에서 세금 뗀 거 10만 원 다시 넣어줌 -> 총 60만 원 아싸). 그럼 한 달에 세후 10만원 손해 보는 건데 1년이면 700만 원이 쌓이는 기적. 그리고 내가 직접 관리 운용할 수 있는 사적 연금도 있어서 거기서도 똑같이 세금 환급받는다. 지난 3년 동안 많이 안 넣은 거 싹 다 끌어 부으면...

역시 세금을 안 떼니 기적이 일어나는군요.

물론 개인 보험 펀드로는 집은 못 산다. 하지만 내가 전혀 믿지 못할 아프리카에서 하도 데여서 연금 못 믿은 거지, 설마 영국 정부랑 금융권이 싸그리 다 십삼 년 만에 망하겠냐 생각하니 집 안 사놔도 괜찮을 것 같음(그리고 지금 영국 정부에서 아주 작정하고 부동산 투자 막고 있음 -_-).

그럼 13년 후 찾을 수 있는 신랑 연금 펀드에 왕창 집어넣고, 내 연금은 아직 18년은 있어야 하니까 - 13년 계획 적금 18년 계획 적금, 25년, 30년 계획 계산해봤다. 중간에 일 그만두거나 짤리는 것도 감안하고 주식이나 본드까지 망할 가능성을 쳐도...

굶어죽진 않겠군.


이거 좀 황당한 말 인건 아는데, 나 정말 성인 되고 처음으로 금전적인 안도감 느꼈다. 모으고 모으고 모아도 충분하지 않은 것 같아 안달했지만, 연금 최대치 넣고, 개인 펀드로 주식이랑 ETF 등등 사두고, 세금 공제되는 ISA에서도 본드 뭐 등등 좀 사놓고 묻어버리면, 집을 사서 어떻게 관리하고 세금 관리해야 하는지 머리 터질 듯 고민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더라.

그리고 이젠 더 잘 버는 직장 찾기 보다는(월급은 올라봐야 어차피 세금 40~45% -_-), 그 시간에 어떤 펀드가 안정적이고 괜찮은지 알아보는 게 훨씬 득이다.

돈 모으는 거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굶어죽지 않아. 

더 이상 더 버는 직장 찾지 않아도 돼.

...라니까 글쎄 다리에 힘이 풀린다고 해야 하나.


물론 라면 먹고 바로 기력 회복해서 크리스마스 핑계로 돈 열라 쓰고 왔다는 얘기. 신랑 비싼 가죽 재킷!!! 무려 200 파운드!!! (우리한텐 무지 비싼 옷이거든요 ㅡ.ㅡ) 애들 스쿠터도 사주고 내 노트북도 새로 사고 (700 파운드!!!!)

하지만 우선 월요일에 택스/연금 컨설턴트랑 상담부터 ㅡㅡ

매거진의 이전글 당신의 일상 생활이 곧 당신이란 사람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