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17일
2048 이라는 게임이 있다. 타일을 이리저리 움직여서 합치고 점수 올리는 게임인데 중독성 있다.
처음 다운로드한 버전은 '되돌리기' 옵션이 전혀 없었다. 실수하면 끝. 그래도 점수 2048 찍는 데 성공했다. 몇 달 더 하다가 4096도 찍었다.
윈폰에서 안드로이드로 전화기를 바꾸면서 새 게임을 깔았는데, 이 버전은 '되돌리기' 옵션이 있다. 무한 취소는 안 되고 딱 한 번만 된다. 그러니까 실수를 두 번 연속하면 망하는 거지만 한 번 실수는 되돌릴 수 있다.
이걸로 최근에 8192 + 4096 + 2048 찍었다. 이 게임 아시는 분은 보면 눈치 채시겠지만 기차에서 흔들려서 손이 두 번 연속 미끄러지지 않았다면 16384까지 올라갈 수 있었을 거다.
이 게임 많이 하면서 실력 늘긴 했지만, 되돌리기 옵션 없이 내가 이 점수 나올 수는 없다. 운이 따르는 게임이기 때문이다. 꼭 실수했을 때만이 아니라, 안 좋은 자리에 새 타일이 생기면 되돌리기 해서 다른 자리에 나오도록 유도할 수도 있다.
삶이 그렇다. 과거로 돌아가서 새로 다 시작할 수는 없더라도 되돌리기 옵션이 있으면 인생 폭망은 피할 수 있다. 중2병으로 방황하다가 드디어 마음잡고 공부하고 싶다면 시간을 되돌릴 수 없어도 부모님이 지원해 주면 플러스. 좋은 동네에 살아서 좋은 과외 학원이 있음. 좋은 학교라서 좋은 선생님이 마침 나를 아껴주셔서 멘트. 명문대 다니는 사촌 오빠 언니가 있어서 입학 정보 제공. 수능 망했지만 재수할 수 있는 집안 지원. 대학 학점 망했지만 어학연수 갈 수 있는 여건. 결혼 잘못 했지만 이혼하고 친정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여유. 직장 잘못 들어갔지만 관두고 다시 다른 거 공부할 수 있는 여유. 좋은 기회 올 때까지 인턴 하면서 경력 쌓을 수 있는 여유. 인간관계 망쳤을 때 다른 그룹 사귈 수 있는 기회.
난 뭐 중간 정도 조건에서 중간 정도로 자란 사람이라 안 주어진 기회도 많지만 그만큼 주어진 기회도 많다. 대입 망했지만 어찌저찌 취업했고, 일찍 결혼했지만 한국이 아니라서 직장에서 안 짤렸다 (...). 한국 시댁이 아니라서 아이 낳으라는 압력 없어서 20대 내내 일했고, 집안에서 지원은 없었지만 직장 있고 하니까 대강대강 먹고 살았다. 아이 둘 낳고도 안 짤렸다. 이직도 가능했다. 친정어머니 찬스 써서 갓난아이 걱정 안하고 석사 공부했다. 아이 봐주는 오페어 아가씨 구하기 쉬운 영국 찬스 써서 그리 비싸지 않은 가격에 애들 등하교 걱정 안하고 직장 다녔다. 그 작은 찬스들이 모이면 점수가 올라간다. 금수저 집에 태어나서 든든한 부모님 빽으로 낙하산 인사 및 정략 결혼 이 정도의 버프는 아니어도, 그 작은 "되돌리기" 옵션으로 그럭저럭 잘 먹고 산다.
정부가 사람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건 아니다. 그 작은 되돌리기 찬스 받은 사람들이 노력 안 했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손이 미끄러졌을 때, 기차 안에서 누가 밀쳤을 때, 전화 와서 놀라 잘못 건드렸을 때, 그럴 때 되돌리기 옵션 한 번만 쓰면... 8192의 기적이 가능하다니깐. 그 옵션 없었을 때 겨우 4096 찍었던 나와, 8192 찍은 나는 같은 실력의 같은 사람이라니깐. 8192의 내가 노오력을 더 열심히 한 건 아니라구.
....다시 시작할 거다 에씨. 16384 찍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