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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gpa May 30. 2018

내가 부러워하는 사람

2016년 5월 5일

(이 글은 2015년 12월 17일에 쓴 페이스북 포스팅에 내용이 추가 되었습니다)

https://www.facebook.com/seattleyangpa/posts/1680227678929379

얼마 전에 "양파님은 옥스포드 출신에 마이크로소프트 데이터 사이언티스트 커리어도 좋고 남편도 돈 잘 벌고 뭐가 걱정이에요??" 라는 소리를 들어서, 몇 달 전에 올렸던 글 다시 재탕.

(참고로, 저 걱정 엄청 많은 사람입니다.)




고등학교 때 하버드 원서 용감무쌍 자신만만하게 넣었다가 떨어진 후에 그 때까지 착하게 살아오던 양파가 지랄총량의 법칙에 충실하게 찌질 만렙 방황 병크 했던 얘기 자주 썼다.

그 때 얘긴데.


사귀던 남친의 직장 보스의 딸이 하버드생이었고 그 때 나한테 하버드 출신이란 이 세상에 실존하지 않는 것 같은 연예인 레벨이었다. 그런데 조사해보니 진짜 정말 하버드 학생.

약 4미터 정도까지 간 게 제일 가깝게 접근한 거리인데 그 아가씨가 만약 어흥! 했으면 놀래 자빠져서 발작했을 거다. 그녀의 눈빛 하나가 예사롭지 않았고 단지 0.001 초 정도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도 나에게 "넌 왜 사냐 이 한심한 인간아 난 하버드생이다 내 후광이 보이냐 후훗" 정도의 의미가 가득한 경멸이 느껴졌다.

뭐, 혼자 착각한 거 안다. 그 아가씨한테 나는 그저 아웃오브 안중이었겠지.

연예인이고 뭐고 그리 열광하거나 꼭 만나봐야겠다 그런 적 별로 없었는데, 나에게 그 아가씨는 연예인 따위는 훌쩍 넘어서 범접할 수 없는, 외계의 신비한 존재 정도였다. 그 전에도 그 후에도 그 정도의 존재감은 없었다.

물론 내가 하버드 가고 싶었는데 못 가서 자격지심에 그랬다는 거 안다. 그 아가씨의 카리스마보다는 내 콤플렉스가 백 퍼센트였겠지.

만약 우리 둘이 말을 나눴다면, 그리고 그 아가씨가 하버드나 미국에 대해서 불평했더라면, 난 단 한 가지 생각밖에 안 들었을 거다.

그래도 넌 하버드 갔잖아 ㅅㅂ아.


그 후에도 그런 욕지거리 나오는 상황 많았다. 부모님이 부도나고 나서 난 정말 돈 벌고 싶었는데, 닷컴 붐으로 떼돈 번 사람이 슬슬 나오기 시작하던 때가 그 때였다. 와 내가 몇 살만 어렸어도, 돈이 조금만 있었어도, 전망 좋은 거 공부하고 집 사서 떼돈 벌었을 텐데 시대를 잘못 타고난 게 서러웠다. 아무리 그 사람들이 뭐 어쩌고 해도, 내 마음 속 반응은 같았다.

그래도 넌 돈 벌었잖아 ㅅㅂ아. 

그래도 넌 집 값 쌀 때 집 샀잖아 ㅅㅂ아.

영국으로 이민 오고 나서는 새로운 불평거리가 생겼다.

그래도 넌 시민권 있잖아 ㅅㅂ아. 

그래도 넌 십 년 전에 영국 와서 집 샀잖아 ㅅㅂ아 등등.

외모 콤플렉스가 없잖아 있다 보니까 딴 여자들이 외모에 대해서 불평하면 나오는 레퍼토리도 무지 많다.

그래도 넌 머리숱 많잖아. 

그래도 넌 체구 자체가 야리야리하잖아. 

아씨 진짜 피부 타고난 사람은 좀 닥치지?

.

.

.

.

시간이 많이 지나서 나도 이제 사십이 다 가까워져 오고, 이젠 나를 보는 사람이 비슷하게 생각할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도 안다.

그래도 넌 영어 하잖아 ㅅㅂ아. 

그래도 넌 결혼했잖아 ㅅㅂ아. 

그래도 넌 영국에서 영주권 받고 집 샀잖아 ㅅㅂ아. 

죽는 소리 해도 어쨌든 헬조선 탈출해서 해외 직장 다니는 년은 닥치지 그래?

.

.

어쨌든 내 불행이 제일 크고, 세상 모든 것은 내 콤플렉스와 자격지심에 뒤틀려 보인다. 이럴 때 상대방이 해 줄 수 있는 말은 없다. 그 때 그 하버드 아가씨가 무슨 말을 해야 내가 좋게 받아들였을까? 아 너도 똑똑한데 못 가서 안타깝다?

됐거든. 넌 갔으니까 그딴 소리 하지.

하버드 별거 없어 - 됐어 ㅅㅂ아. 다니고 있는 사람의 여유지. 

하버드 정말 좋아. 너도 와 - 말은 쉽지?? 놀리냐?? 

아예 하버드 얘기 안 함 -> 말 안 한다고 내가 못 느낄 거 같냐??

.

.

이 패턴이 바뀌지 않는다. 나를 부러워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없고, 내가 부러워하는 사람 역시 나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이 없다(참고로 내가 죽어라 부러워하는 사람은 1) 좋아하는 거 하면서 먹고 사는 사람 2) 좋은 피부 타고 태어난 사람 3) 나이 25세 이전의 모든 인간들 4) 하고 싶은 공부 하는 사람 5) 집중력 있는 사람 6) 머리숱 많은 사람 7) 타고나기를 체형이 55 이하인 사람 8) 목소리 예쁜 사람 9) 노력형 인간 10) 피부 두꺼워서 잔주름 안 가는 사람 11)...찌질하니까 그만두겠다).

오늘도 보스 붙잡고 찌질한 소리 했다는 얘기다. 너 같은 사람들은 날 이해할 수 없어 뭐 어쩌구 하면서.




그리고 부러움의 얇은 포장도 이해 못 하는 상대방이 그 아래 수 년 켜켜이 쌓여온 내 간절한 열등감, 그 사람의 존재만으로 속 뒤집어지는 그 못남까지 어이 이해할까. 이젠 많이 나아졌다 해도 난 아직까지 하버드 출신이라면 아주 조금이나마 움찔하거든.

그럼 이제 어느 정도 니 삶이 안정되었으니 부러운 거 없어졌냐 하면.

설마요 ㅎㅎㅎㅎㅎㅎㅎ

아직도 이공계 박사 한 사람들 부럽고,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거 하면서 잘 먹고 잘사는 사람들 부럽고, 좋은 피부 타고 태어난 사람들 부럽고, 나이 25살 이전 모든 이들이 부럽고, 나보다 수학 잘 하는 사람 부럽고, 집중력 있는 사람들 부럽고, 하고 싶은 공부 하는 사람 부럽고, 머리숱 많은 사람 부럽고, 체형 자체가 여리여리한 55 여자들 부럽고, 목소리 예쁜 사람 부럽고, 노력형 사람들 부럽고 그렇다. 나이 들면서 부럽다는 마음 자체가 많이 바래져서 그래 너는 좋겠구나 정도로 끝나고 욕은 안 나온 지 오래됐다는 정도의 차이일 뿐.

그지 같은 패로 피박에 옆 사람이 쓰리고 불러도 판 못 엎는구나 끝까지 가야 하는구나 뭐 그렇게 포기를 하는 거죠. 마찬가지로, 내가 가진 무엇이라도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 하는 걸 매일매일 감사하고 삽니다.


예: 
저는 직모라서 머리 드라이를 안해도 됩니다. 부럽죠? 
저는 반영구를 해서 비비 크림만 바르면 출근 준비 완료입니다. 부럽죠? 
워낙 튼튼해서 뭐 옮기고 하는 거 잘 합니다. 우리 남편이 부럽죠?

...테러 당하기 전에 그만 하고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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