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 17일
* 낚시라고 할까봐 먼저 픽션 경고.
아무 이름이나 붙여서 댄이라고 하자. 댄은 30대 후반의 중견 개발자다. 결혼 4년차에 아이가 둘 있다. 부인 하이디는 결혼 전에는 회계사였다가 이제는 집에서 아이 둘을 보고 있다.
그리고 댄은 요즘 퇴근하기가 싫다.
댄의 제일 큰 비밀은, 하이디와 말하는 게 편하지 않다는 거다. 사실 한 번도 편한 적이 없었다. 하이디는 모른다. 그녀에게 댄은 자상하고 친절하고 사려 깊지만 좀 내성적인 남자다. 현실의 그는 혼자서 일하는 게 훨씬 편한 귀차니스트다.
하이디 앞에서는 하면 안 될 말이 많다. 그녀의 부모님이 사실은 싫다던가, 결혼 생활에서 성생활 빼면 무슨 의미냐라던가, 솔직히 직장 일도 힘든데 집에 들어오자마자 집안일 시켜야 되겠냐 뭐 그런 말은 당연히 하기 힘들지만 간단한 말도 하기 어렵고, 하기도 싫다.
"나 오늘 피곤해" 라면 하이디는 당장 "자기 운동 좀 해야지! 안 그래도 살 좀 쪘던데! 운동하면 좀 덜 피곤하대!" 할 거다.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운동하라고 잔소리하겠지.
"나 좀 기분이 그러네"-> "그래? 앉아봐. 왜 그런지 말 해봐." 아니 나 그냥 오락하면서 멍 때릴래.
"난 좀 매운 거 좋아하는데"-> "자기 혼자 좋아하는 음식을 어떻게 해? 애들도 먹어야 하는데 그냥 같이 먹지, 나도 힘들게 준비했는데 그렇게 말하면 내가 힘이 빠지고 하루 종일 얼마나 어쩌고저쩌고" ->왜 니 취향 같은 거 말해서 나 번거롭게 하냐 ㅅㄲ야로 들림.
뭔 말을 해도 좋은 반응이 안 나온다. 물론 그 말도 하면 개박살난다. 그래서 그냥 말을 안 한다. 듣고 싶어 하는 말만 한다. 어, 나 별일 없었어. 자기 힘들었지? 애들은? 내가 뭐 도와줄 거 있어?
그런데도 가끔씩 "난 당신 속을 모르겠어. 뭔가 우리 사이 연결이 끊어진 것 같아" 소리 하면 확 뒤집고 싶다. 더 어쩌라고?? 벌써 네가 하라는 대로 다 맞춰주고 있잖아??
하이디는 예뻤다. 똑똑했다. 섹시했다. 아마 지금도 다른 남자들은 그렇게 볼 거다. 그래 봐야 별 볼 일 없다 말해주고 싶다. 아이 가진 후로 부부관계는 분기 행사 정도로 됐다. 그는 가끔 궁금하다. 그렇게 독하게 다이어트하고 화장하는 하이디. 누구한테 보이려고 그런 걸까? 다이어트 좀 덜 하고 비싼 옷 안 차려입어도 잠자리만 일주일에 한 번 즐겁게 하면 백 배는 더 예뻐 보일 것 같다.
댄의 두 번째 비밀. 하이디에게 말은 안 했지만 그는 이혼을 고려하고 있다. 순전히 섹스 때문에. 하이디는 그가 순한 개발자라서 그런 데엔 관심 없다고 생각한다. 천만의 말씀. 그의 IT 실력으로 아주 훌륭하게 포르노 사이트를 몰래, 자주 접속하고 있다. 물론 하이디에게는 그런 거 안 본다고 한다. 그래서 하이디는 자기 친구들에게 우리 남편은 그런 거 안 본다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하이디가 엄청 깔끔하게 관리하는 집안이라 그의 공간은 현관 옆 작은 서재가 다다. 그나마도 옷방으로 만든다는 걸 그답지 않게 지랄해서 지켰다. 그리고 그는 그 넓은 집을 놔두고 기회만 되면 그 서재로 들어간다. 어차피 그의 공간은 거기 밖에 없다.
들어가서 하는 거 별로 없다. 그냥 멍 때린다. 하이디는 그가 멍 때릴 때마다 "무슨 생각해?" 하고 물어보는 아주 짜증 나는 버릇이 있다. 아무 생각 안 한다는 게 그렇게 이해가 안 되나보다. "무슨 생각이라도 할 거 아냐?" 그래서 그는 이제 코딩 스크린을 띄워놓고 고민하는 척한다. 아예 안 들어오겠다 싶으면 포르노 본다. 하이디는 그가 그렇게 서재에 '숨어' 있을 때마다 섭섭하다며 문이라도 열어두라고 하지만 천만에 만만에다.
하이디는 그보고 부럽다고 한다. 좋아하는 일 하면서 돈 버니까 얼마나 좋냐고. 그리고 하이디가 다시 직장 복귀할 기미는 안 보인다. 회계사라서 파트 타임 자리도 많은데 절대로 관심 없다. 회계 일에 관심 있어서 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사진 찍는 걸 배운다, 꽃꽂이를 배운다 하면서 돈만 들인다. 그리고 그렇게 집을 비울 때는 하이디의 부모님이 온다. 정말 싫다.
하이디는 모른다. 그가 매일같이 집에 올 때마다 얼마나 짜증이 나고 분한지 모른다. 내가 산 집인데, 내 공간은 그 옷장만한 서재 하나뿐이다. 집안 곳곳이 규율이다. 셔츠는 여기 넣고, 애들 장난감은 종류별로 넣어야 하는 곳이 다르고, 커튼은 치면 안 되고, 수건은 네모로 접어서 하이디가 원하는 곳에 둬야 한다. 장 봐와서 냉장고에 정리해 넣는 것도 하이디가 정한 규칙대로 따라야 한다. 치즈는 둘째 선반. 고기 종류는 셋째. 그리고 그의 집에서 시간을 제일 많이 보내는 사람은 하이디의 가족과 친구들이다.
하이디는 농담이라고 사람들 앞에서 하는 말에 그는 웃지 않는다. '우리 바보 같은 공돌 신랑, 이런 말도 이해 못 해'. 많이 벌어오는 편인데 하이디는 고맙다는 말 한 마디 없다. 그가 벌어오는 건 당연하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일 하면서 벌어오는 거라고 더 그런다. 그래도 일은 일이거든? 나도 스트레스 받거든? 그렇게 쉬워 보이면 니가 하지 그래?
그런데 이혼 안 하는 이유? 세상 무엇보다 더 이쁜 그의 두 딸. 아빠아빠 하는 큰딸과 이제 기기 시작하는 둘째. 그리고 이혼하면 어차피 그가 개새끼가 될 것이고, 집은 하이디가 가져갈 거고 그는 방을 얻어 나와서 혼자 살며 돈만 보내야 할 거기 때문에.
아니 애 보는 거 쉽지 않은 거 아는데, 나는 뭐 출근해서 닐리리야 무지개 빨다가 오는 것처럼 말하지는 말지?
둘 다 어린이집 보내면서 낮 시간에 요리 좀 하지? 아님 집에서 애들 좀 더 보면 집안 경제에 도움 많이 될 텐데?
더 큰 집 가자고 조르려면 너도 좀 벌어오지? 취업 어려운 것도 아니면서.
내가 내 돈 주고 산 집인데, 내 물건 지저분하다고 구박하지 좀 말지?
무엇보다, 나 퇴근하면 그냥 웃는 얼굴로 일 열심히 하고 왔지요? 맞아주고, 밍밍한 음식 했더라도 난 매운 거 좋아하니까 칠리소스 챙겨 주고, 잠깐 혼자 멍 때리게 해 주고, 가끔은 내가 예상하지도 않을 때 옆구리 찔러서 잠자리하자 하면. 그 정도면 진짜 내가 죽도록 충성할 텐데. 그게 그렇게 힘드냐? 난 매일같이 너 눈치 보고, 말조심하고, 너한테 백퍼센트 맞춰주는데, 그게 그렇게 힘드냐? 니가 그렇게 미치도록 손해 보는 것 같냐?
의도 저의 그런 거 없고요, 제가 주위에서 가끔 봐 왔던 스타일 몇 개 합했습니다. 물론 하이디 입장에서도 쓸 수 있습니다 ㅎㅎ. 하이디의 변명(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