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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gpa May 30. 2018

하이디의 변명

2016년 6월 19일

어떤 중년 개발자의 하루(링크) 에서 이어집니다. 


하이디의 어머니는 조숙한 하이디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쯤에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갔다. 감정의 기복이 별로 없고 조용하던 그녀의 아버지가 그리 서럽게 울며 일상생활이 불가능했던 때가 그 한 해였다. 미안해 내 딸, 하지만 난 이렇게 평생 살 수 없어 하며 매정하게 떠나간 하이디의 엄마는 얼마 되지 않아 그 남자에게 버림받고도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도 하이디의 아버지에게는 그게 더 충격이었을 것이다. 안정적인 삶, 여전히 부인을 기다리는 남편과 예쁜 딸이 있는데도 어머니는 극빈자로 이리 저리 떠돌아다니기를 선택했다. 


그걸 보고 나서야 하이디의 아버지는 포기했다. 그리고 약 일 년 후, 아이 낳을 생각이 없는 인문학 교수 헬렌은 하이디의 새엄마가 되었다. 

아이를 낳고도 하이디에게 별로 관심이 없던 친엄마에 비해 헬렌은 완벽한 새엄마였다. 마음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로, 조언해 줄 수 있는 언니로, 그리고 위로해주며 무엇이든 도와줄 수 있는 엄마가 된 헬렌과 하이디는 친모녀보다 더 가깝게 지냈다. 

그리고 하이디는 평생을 헬렌과 똑같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다. 잔잔하고, 친절하고, 깔끔하고, 똑똑한 헬렌은 그녀의 우상이었다. 친엄마는 예쁘고 사교성이 풍부했으나 변덕이 심했고, 지저분했고, 말이 많았고, 일관적이지 못했다. 하이디는 아버지와 헬렌의 조언을 따라 수학을 열심히 공부했고, 회계를 전공했다. 옷을 아무데나 벗어 던져두던 친어머니와는 정반대로 방을 늘 깔끔하게 정리해서 헬렌에게 칭찬을 들었다. 옷을 늘 조신하게 입고, 건강에 좋은 음식 요리를 하고, 매일 조깅을 했다. 


그러다가 대학교에서 음악을 전공하는 조엘을 만나면서 모든 게 망가졌다. 카리스마가 넘치고 유머 있고 음악 쪽으로 천재적인 조엘은 광적으로 집요하게 하이디에게 구애를 했고, 결국 넘어간 하이디는 그와 20대 초반을 보냈다. 계절이 지나고 해가 지나면서 하이디는 점점 바뀌어갔다. 그 둘은 미친 듯이 싸우고, 뜨겁게 섹스하고, 정신 나간 듯이 웃고, 아무런 계획 없이 내키는 대로 여행을 떠났다. 그러다가 또 싸우고, 조엘은 폭언을 하고, 하이디는 물건을 던졌다. 

사귄지 3년이 되던 해, 조엘은 바람을 피웠다. 하이디는 조엘의 머리를 뜯고 싸웠다. 조엘은 참다못해 하이디를 내쳤고, 하이디는 벽에 머리를 부딪치고 정신을 잃었다. 

조엘은 눈물을 흘리며 사과했다. 다시 재결합 한 둘은 3개월이 되지 않아 또 싸웠다. 조엘은 곧바로 헤어지자며 집을 나가서 다른 여자와 밤을 보냈고, 하이디는 그의 옷을 다 가위로 찢었다. 이런 지겨운 패턴이 다섯 번을 반복하고서야 하이디는 그만둘 수 있었다. 아니,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와 헬렌을 방문하러 갔다가 싸우는 바람에 그 모습을 들켰기 때문이다. 그 때 아버지의 눈에서 본 실망감을 잊을 수가 없다. 짐승처럼 소리 지르면서 조엘에게 덤비는 하이디. 그의 뺨을 때리고 그의 물건을 집어던지는 하이디. 그런 하이디의 손목을 쥐어 잡고 똑같이 욕설을 퍼붓는 조엘. 


댄을 만난 지 4년이 지났다. 하이디는 조엘과는 극과 극인 댄에게 끌렸다. 이성적이고, 똑똑하면서도 수줍고 착했다. 한 입으로 두말하는 일 없었고 아이들에게 무척이나 자상한 남자다. 하이디 자신이 전업주부인데도 가사일을 많이 분담해준다. 둘은 한 번도 언성을 높여서 싸운 적이 없다. 욕을 한 적도 없다. 언뜻 보면 헬렌과 아버지의 결혼만큼이나 이상적이다. 

그런데 하이디는 이혼을 생각한다. 목 죄어오는 답답함을 느낀다. 

처음에는 댄이 수줍어서 자기의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 미스테리한 면에 끌렸다. 같이 살면서 그의 내면을 발견하는 사람은 하이디 자신 혼자뿐일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틀렸다. 댄은 내면을 공유할 의지가 없었다. 


결혼 4년이 지났어도 댄은 자기 얘기를 하지 않는다. 어렸을 때 얘기도 하지 않고, 친구들 얘기도 꺼내지 않는다. 물어보면 불편해 하면서 피한다. 

“아니 난 별생각 없는데?” 

“뭐 별거 없어.” 

“글쎄 잘 모르겠어.” 

그가 제일 잘 하는 말이다. 어떤 사람에게 실망하는지,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 어떤 일이 제일 슬펐는지, 무슨 일에 상처를 받았는지 등등 아무리 물어봐도 소용없다. “글쎄? 잘 모르겠어” 가 그렇게 여러 가지 상황에 써먹을 수 있는 말이란 것은 그를 만나고야 알게 되었다. 

타고난 엔지니어라 해결책을 제시하는 쪽을 좋아한다 해서 그렇게 대화 방식을 바꿔봤으나 오히려 반응은 더 안 좋았다. 

“출근하기 어때?”

“아 조금 피곤했어.”

“그럼 나랑 같이 운동할까?” 

그러면 댄은 어깨를 으쓱하며 피해버린다. 어떻게든 같이 시간을 보내려고 하는데 댄은 자기 서재 안에 들어가 숨는 쪽을 훨씬 더 선호한다. 심술이 나서 그의 공간을 최대한 줄이고, 거실에 그의 큰 의자를 만들어 두고 침실에 일할 수 있는 책상을 갖다 놔도 그는 쓰지 않는다. 가족들과 같이 어울리고 싶은 마음이 없다. 자신의 친구도 별로 없고, 하이디의 친구와 같이 어울리려면 아무 말 없이 있다가 슬그머니 핸드폰을 꺼낸다. 집에 손님이 와도 조용하다 싶으면 서재로 도망가고 없다.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있었냐 물으면 - “아니, 난 별 생각 없는데?”. 손님 앞으로 더 초대하지 말까 하면 “아니, 뭐 난 괜찮아. 왜, 안 좋은 일 있었어?”


한 번은 얼마나 가나 싶어 아예 혼자서 뭘 하든지 무시하고, 손님이 와도 아예 부르지도 않았다. 그는 한 달이 지나서야 쭈삣거리며 “혹시 무슨 일 있어?” 물었다. 

하이디는 그래서 더 노력한다. 나도 이성적인 여자고, 살림 잘 하고 아이들 건사 잘 하는 여자라는 것을 매일같이 강조한다. 그러나 댄은 거기엔 무심하다. 모델 하우스 같은 집을 다른 이들은 다 찬사를 보내지만 댄은 들어오자마자 가방을 아무 데나 놓고 빨래도 정해진 곳에 나눠 넣지 않는다. 식기 세척기를 비우지만 접시나 컵을 아무데나 집어넣는다. 행주 넣는 곳에 걸레를 넣고 이빨 닦은 후에 칫솔도 정해진 컵에 넣지 않는다. 

별거 아닌 거 안다. 안 한다고 안 죽는 것도 안다. 하지만 하이디는 댄이 그럴 때마다 “네가 노력해봐야 다 소용없어. 뭐 이딴 거에 시간 낭비하고 그래” 하는 것 같아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다. 

아니 나한텐 중요해. 내 삶이 이렇게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다는 거, 나한테는 중요해. 내가 너보고 정리하래? 조금만 신경 써주면 되는 걸, 그게 그렇게 싫어? 


댄은 어릴 때부터 하고 싶은 게 딱 하나였고, 그래서 그걸 전공했고, 그걸 아주 잘해서 별 고민 없이 직장 다니는, 그 부러운 사람 중 하나다. 하이디 자신은 뭘 하고 싶은지 몰라서 고민만 많았고 회계를 전공하긴 했지만 끔찍하게 싫었다. 댄을 보면 부럽다. 명석한 머리가 부럽고 다른 아무것에도 신경 안 쓰고 출근해서 잘 하는 거 하면 많은 월급이 나오는 삶이 부럽다. 자신은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댄과 소통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없어지면서, 그의 손길이 싫어졌다. 하이디 자신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이해할 욕구도 없으면서 이 남자는 그냥 섹스만 원하는 걸까 싶어서이다. 그렇다면 다른 아무 여자여도 상관없겠지. 여자이기만 하면 되니까. 단지 내가 법적 아내고, 섹스해도 문제없는 여자니까 원하는 걸까. 만약 다른 여자지만 해도 안 걸린다면 섹스하려고 하겠지. 

왜 자신과 결혼했는지 점점 더 이해할 수 없고,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멀게만 느껴지는 댄을 보면서 하이디는 점점 심술을 부린다. 댄이 좋아하는 음식은 하지 않고, 그가 관계하고 싶다는 신호를 보내도 모른 척한다. 손님이 와서 떠드는 걸 싫어하는 거 잘 아니까 주말 내내 부른다. 

차라리 조엘처럼 화를 냈으면 좋겠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뭐가 싫은지 알 수 있으면 좋겠다. 가끔가다 툭툭 새어나와서 사람 신경 엄청 건드리는 언중유골 - “집에 있으면 시간 좀 있지 않아?” “다이어트를 왜 그렇게 열심히 해?” “밥이 좀 싱겁네” 등등 - 이 미치도록 얄밉다. 그냥 내놓고 말 좀 했으면 좋겠다. 화끈하게 싸움이라도 하면 어떤 식으로든 결정이 날 것 같다. 


그 날 저녁도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아이들과 좀 놀아주더니 서재로 스르륵 사라지는 댄을 보면서 하이디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른다. 

너 도대체 뭐야? 왜 나랑 결혼한 거야? 날 사랑하긴 했니?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긴 하니? 내가 오늘 사라지고 좀 더 둔하지만 친절한 여자가 갑자기 생긴다면, 눈치는 챌 거니? “아, 난 상관없는데…” 하고 어깨 으쓱하면서 컴퓨터 화면 또 들여다보지 않을까? 




* 퇴고고 뭐고 없이 30분 동안 쭈루루루루룩 써내려서 바로 올립니다. 픽션인거 아시죠? 

* 하이디도 여러 버전으로 쓸 수 있습니다 ㅎㅎ 반응 좋으면 다른 부부도 시리즈로 갑니다 >.<  <- 날림으로 써서 후루룩 올리는 주제에 이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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