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 사이언티스트의 하루

2016년 7월 18일

by yangpa

* 페이스북에서는 여성 독자분으로 제한한 포스팅이었습니다.


타이틀이야 거창하지만 난 개발자였다. 데이터 다룬다고 직함 바꿔준 거다. 어쨌든. 그럼 데이터 사이언티스트는 뭐해서 먹고 삽니까? 뭔가 대단한 거 합니까? 물어보신다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아주 잔인하게, 솔직하게, 자세하게 말해 드릴 수 있다. 왜냐면 난 별거 없기 때문이다.


1. "까라면 까"


뭐 내 커리어 관리하고 기술력 높이고 다 좋은 목표지만, 직장 생활은 기본적으로 "까라면 까"더라. 돈을 내가 이만큼 줄 테니까 니는 내가 시키는 것을 열과 성을 다하여...가 아니면 아 뭐 내가 짜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정도로는 해 놔라가 되겠다. 그러므로 일 시작하기 전에 말했던 것과, 고용 계약 쓰고 나서 맡게 되는 프로젝트는 다를 가능성이 높다. 나야 뭐 이제 4년 넘어 5년 차 되어가니까 진정 잡부가 되었다.


오늘 아침에 갑작스레 날아온 지시.

"스웨덴, 체코 프라하에도 우리 데이터 플랫폼 쓰는 사람 많던데 출장 좀 다녀와라."


음. 가기 싫다. 하지만 난 까라면 까야 한다. 안 까고 싶으면 "존경하는 지도자 동무, 견줄 수 없는 훌륭한 비전이시오나, 미천한 제가 아주 작은 조언을 드리자면, 체코보다는 그리스 출장이 어떨까 하옵니다(거기 아직 안 가봤거등요. 여름에 좋대요!!)"라고 말 할 수 있는 데이터 프레젠테이션을 만들어야 한다.


2. "나 개발자 맞기는 맞냐?"


개발자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은 게으름이다. 똑같은 일을 두 번 해야 한다면 아주 온 몸에 두드러기가 날 것 같은 반응이 온다. 수작업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그냥 수작업으로 했으면 한 시간에 끝냈을 것을 다섯 시간 들여서 스크립트를 만드는 인간이 개발자다.

자. 우리 시스템을 쓰는 사람들 이메일 주소가 있다. 이걸 하나하나 인트라넷에 쳐 넣으면 어느 사무실에서 일하는지 뜬다. 그런데 내가 "주시해야 하는 팀"으로 정리해둔 주소는 몇천 개다. 물론 제일 중요한 팀 수십 개만 뽑아서 리포트만 이쁘게 해 올려도 어찌어찌 될 수 있겠으나... 몇십 개도 손으로 하기 싫음. 그리고 내가 '중요한 팀'으로 고른 기준을 보고 다른 기준으로 뽑아와 하면 다시 다 해야 하잖아?

스크립트를 써야 한다.

근데 귀찮다.

나 개발자 맞기는 맞냐?

귀차니즘 보아하니 맞긴 맞는데...


3. "다 귀찮아. 뭐가 제일 빨라?"


제대로 하려면 인트라넷 API를 찾아야겠는데 - 마소에서 일하는 이의 슬픔이라면, 저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마소 시스템 문서가 마소 시스템엔 해당 안 되는 경우가 꽤 있다. LDAP/ ADFS 이런 거 보자. 내가 회사의 LDAP 서버를 관리 한다면 뭐 이거 저거 가능하겠지만, 마소 HR 시스템에서 일개 나부랭이 사원한테 관리자 권리 줄 리는 없고 ㅋㅋ API 문서 찾아보려면 이건 마소 직원 정보 빼내겠다는 건데 또 무슨 보안 뭐 어쩌고 복잡해질 거 같다. 간단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찾아보기 귀찮아. 뭐가 제일 빠를까?


4. "...딴 사람이 안 보면 괜찮아 +_+"


귀찮은 개발자는 이제 위험한 생각을 한다. 그래, 내가 30분 만에 쓰고 휘리릭 돌려서 결과만 내서 보고하면 되잖아?? 나중에 시간 있을 때 제대로 된 거 쓰고 지금은 그냥 최고 빠른 거 하자. 어차피 이거 뭐 메인 코드 베이스 들어갈 거도 아니고 그냥 내가 쓰는 스크립트잖아.


내가 이래서 이번 인생은 망했다. 장인 정신이 없어, 장인 정신이.


5. "오! 이런 것도 있네? 그래, 내가 이런 건 좀 써보자!"


귀차니즘 만으로 본다면, 최대 빠른 방법 찾아서 그냥 휘리릭 해 보면 되는데, 이제는 일 피하기 본능까지 발동되었다. 뭔가 요즘엔 다른 거 있나 보고 싶다. 마침 딴짓하고 싶은 다른 개발자가 "너 이런 거 써 봤어?" 한다. 자바스크립트로 headless browser 쉽게 만들어서 테스트할 수 있단다. 오. 그래. 내가 자바스크립트 좀 안 한지 됐지. 아무리 못해도 이건 간단하니까 한 시간이면 쓸 텐데 자바스크립트로 해 보자.


6. 개미지옥


자바스크립트 안 쓴 지 오래됐다. 얼마나 오래 됐냐면, 내 참. 창피해서 말을 못 하겠네. Async인 것도 잊어버리고, set timeout하는 것도 잊어버려서 time.sleep() 이런 거 없나 찾고 있다. for 룹 조차도 먼저 구글로 찾아봐야 한다. 그리고 그놈의 )}; 이거 괄호 맞추기 때문에 한 시간을 허비했다. DOM이랑 jquery 신택스도 다 잊어버렸다. 이젠 내가 뭘 하려고 했는지도 잊어버렸다.


7. "너 뭐하냐...?"


디버깅 삼매경에 빠져있었다. "아씨 다 엎어버리고 그냥 하던 걸로 할까?"는 잊어버렸다. 제대로 코딩 안 했다는 부끄러움도 잊어버렸다. 이젠 왜 이 간단한 게 안 돌아가는가에 대한 분노와, 나 자신에 대한 혐오 뭐 등등에서 왔다 갔다 하던 중, 동료가 슬쩍 말을 건다. "너 xyz하기로 되어있던 건 어케 됐냐?"

그래. 정신 차려야지. 뭐 어찌어찌 돌아가게는 했다.


8. 컴퓨터 프로그래밍의 아름다운 순간


어떻게 하는지를 몰라서 그렇지, 하나만 할 수 있으면 나머지는 다 똑같다. 그러니까 이름 세 개 가지고 사무실 찾는 거나 3천 개 찾는 거나 로직은 똑같다. 그리고 그게 샤샤샥 돌아가면서 결과를 뱉어내면..

나는 진정 천재인가 하는 벅찬 감동이 차오른다.

겨우 몇백 개 돌리고 나서 메모리 문제로 죽기 전까지 -_-; 아 이 쪽팔림. 아 몰라. 어쨌든 다 돌리고 보자.

9. 자. 정보 다 받았다


어차피 정보 퍼오는 김에 직급이랑 뭐 그 외 잡다한 것도 퍼왔다. 이제 우리 시스템 많이 쓰는 사람들, 쓰다 관둔 사람들, 로긴만 하고 다시 안 온 사람들 등등을 도시별로 직급별로 볼 수가 있다.

....근데 체코 사무실에 사람 많네 ㅠ.ㅠ 피하려 했더니.

동구권에 뭐 이리 많아??

오! 일본에는... 음. 주소 열 개밖에 없군. 나 일본 가보고 싶었는데.

프랑스는 셋.

원하는 결과가 안 나오는데, 엎어버릴 수도 없고.

...스웨덴이랑 체코 가야 하는구나.


10. 하루의 끝


점심 먹고 나서 시작했으니 꼬박 반나절을 바쳤는데 아직 리포트는 안 썼다. 삽질하는데 두세 시간 버린 거 같다. 나는 왜 이 모냥일까. 딴 사람들은 십 분 만에 하는 걸, API 제대로 찾아봤으면 그냥 REST request로 몇 분 만에 돌릴 걸... 아니지. 귀찮았을 거야. ADFS auth하는 게 얼마나 그 지같이 귀찮았는데. 설마 직원 정보를 아주 간단하게 퍼갈 수 있게 하진 않았을 거고. 그래도, 내가 이 단순한 거 할려고, 그렇게 간단한 자바스크립트 코드 가지고, 그렇게 오래 삽질했냐. 왜 사냐. 실제 코딩 20분. 나머지는 다 씰데없는 디버깅. 삽질.

아 몰라. 포켓몬이나 잡으러 가자.

그렇게 직장인 양파 씨는 핸폰 들고 퇴근했다는 얘기입니다.


결론.

단 하루 동안에도 -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은 뭔가 훨씬 더 대단한 일 하고 있을 것 같은 불안감

귀찮음에 아무거나 빠른 걸로 막 썼다는 죄책감

어디 가서 보여줄 수 없는 코드에 대한 자기혐오

그래도 제대로 돌아갔을 때의 환희

위에서 시키는 지시가 맞았음에 우울

이 정도 실력에도 개발 공부 안 한다는 자기혐오 x2

뭐 이렇게 골고루 하고 삽니다.


이런 글을 여성 독자로 제한하는 이유.


공개했을 때에 이런 댓글이 달립니다:

- 아이 양파님 그렇게 하지 마시고 xyz로 하시면...

- ADFS 쓰시나봐요?

- 메모리가 왜 문제가 생겼죠?

- 자바스크립트는요 어쩌고저쩌고

- 에이, 그걸 그렇게 하시니까 그런 문제가 생기죠. 그건 이런 식으로...


내가 남자 개발자들이랑 하루 이틀 일 해보나 핫핫핫. 하소연 포스팅에서도 설교 당하기는 싫어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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