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상잡담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angpa Dec 31. 2017

신김치와 신랑 그리고 시어머니

2016년 10월 28일

     

* 2008년 8월 30일의 대화 (블로그가 이래서 유용하다) 


라면을 끓였다. 신김치 한 포기를 꺼내서 작은 통에 담고 진라면이랑 같이 먹다 보니까 신랑이 옆에서 김치를 자꾸 훔쳐 먹는다.     

한참 있다가 보니까 한 통이 다 비었다! 설마 신김치 한 포기를 한 자리에서 다 먹은 건 아니겠지??     


양파: 신랑아! 김치 다 먹었어!!?? 

신랑: (ㅡㅡ ) ( ㅡㅡ) 아니! 

양파: 여기 이 통에 있던 거 다 먹은 거 아냐?? 

신랑: 아유, 난 또 김치 다 먹었냐고 묻는 줄 알았지. 

양파: 이 통 김치 다 먹었냐고 묻는 거 맞아.

신랑: 세상에 김치가 얼마나 많은데 그걸 내가 어떻게 다 먹겠어!! 그냥 그 통에 있던 것만 비운 거야!

양파: 야! (퍽!! 퍽!!!)     


내가 질문을 제대로 안 한 거라고, 끝까지 자기는 진실만을 말한다고, 아직 세계에는 김치가 충분히 많이 남아 있으니까 걱정 안 해도 된다고 우기다가 몇 대 더 맞았음.     


신랑: 아직 김장 김치 많이 남았는데 괜히 그래 ㅜ.ㅜ     




* 2007년 3월 13일 글     


신랑은 신김치 킬러다.     

처음 연애하던 시절, 그러니까 슴둘 애기양파를 쫓아다닐 적에, 개발자로서의 자존심까지 접고 양복 차림으로 양파 부모님 댁에 갔었더랬다. 절대 양놈한테 딸 안 주신다던 어머니는 아주 작정하시고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한국 음식만 잔뜩 내놓았다. 기억으로는 포크 나이프 이런 것도 없이 젓가락만 주고 그냥 먹어라 하셨다.     

신랑, 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마늘장아찌, 김치, 국, 찌개, 고기 뭐 안 가리고 다 먹었다.     

물론 부모님은 이눔이 우리 딸을 꽤 좋아하는구나 라고만 생각하셨다. (그러고 보면 한국 사람은 외국 사람들이 한국 음식 안 좋아할 거라고 생각해버리는 버릇이 좀 있다.) 매운 것도 잘만 먹고 김치 열심히 먹는 걸로 보아 하니 나에게 교육 단단히 받고 왔구나 정도로 짐작하셨던듯. 

    

......신랑 원래 다 잘 먹는다. 그리고 신 음식 미친 듯이 좋아한다. 김치도 생김치는 먹지 않고, 팍삭 식어서 가스가 슬슬 스며 나오는 (......) 그런 김치를 좋아한다. 깻잎하고 마늘장아찌 있으면 밥 한 그릇 먹고 김치 좀 많다 싶으면 혼자 김치볶음밥 해서 먹는다. 고추장이랑 마늘 넣고 파도 송송 썰어 넣은 다음에 참치 한 캔 넣어서 밤참 해 먹는다.     

그 외에 기상천외한 음식도 잘 만들어 먹는 편이다. 식빵 토스트에 콩이랑 토마토소스랑 블루치즈랑 얹은 다음에 식초 확 뿌려서도 먹고, 해외여행 갈 때마다 고래 고기나 이상한 음료수같이 희한한 거 먹어보는 건 신랑이다 (난 순대도 안 먹는다).     


신랑님은 나보다 매운 거 더 잘 드신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이 '이거 안 매워요?' 하고 자꾸 묻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다. 김치는 상큼하고 (ㅡ.ㅡ) 비냉이 좀 매콤하며 그 외 한국 음식 중에 진짜 매운 건 별로 없었단다. 한국 음식 중 불고기나 삼겹살은 너무 달아서 싫단다. 좋아하는 거 꼽으라면 무조건 신김치. 두 번째로는 조금 덜 신 김치. 세 번째로는 마늘장아찌. 네 번째는 덜 익은 김치 정도.     


재미있는 것이, 이렇게 다 잘 먹는 신랑이 시댁 가면 절대 밥 안 먹는다. 시어머니가 요리를 잘 못 하시기도 하지만, 정말 이런 못돼 처먹은 놈이 있나 싶을 정도로 어머니 해놓은 음식에 잔소리를 해가며 안 먹는다. 덕분에 시어머니는 내가 아주 불쌍하게 살고 있는 걸로 알고 계시다 (...) 찬밥에 김치만 줘도 잘 먹는데 말이다.     

두 주 전, 시댁에 잠시 들리려고 전화를 드렸다. 시어머니가 저녁 안 먹었으면 와서 먹으라고 하시자 신랑 바로 대꾸했다. "KFC 가서 닭튀김이나 사 갈래" 시어머니, 인간아 그렇게 살지 말라고 혼내시자 신랑 한숨을 푹 내쉬며 알았다고 했다.     

시댁에 도착해서 부엌에 바로 들어간 신랑, 어머니가 해 두신 음식 보고 "......어머니 KFC 별로 멀지도 않던데 닭튀김 좀 사오시지."     

한 대 맞았다. -_-     


그래도 한국 음식 잘 먹는 거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하고.     


참고로, 두 번째로 우리 부모님 뵈러 갔을 땐 엄마가 회랑 초장 딱 두 개만 내놓았다. 신랑은 맛있게 냠냠 다 먹었다. 부모님이 한 번 더 감동했다.     




그리고 2016년의 남편은 여전히 신김치를 좋아합니다. 토스트에도 얹어먹습니다. 파스타에도 썰어 넣습니다. 식초도 더 뿌려서 먹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신랑이 뭔가를 보고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