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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gpa May 30. 2018

쇼핑의 여혐

2016년 12월 16일

영어로 앞뒤 자르고 설명 없이 the pill 이라 하면 경구피임약이다. 경구 복용약이 얼마나 많겠냐마는, 어쩌다 보니 피임약이 대표적인 약이 되었다. I'm on the pill 하면 피임약 먹고 있다는 거지 혈압약 먹고 있다는 말이 아니다. 혈압약이라면 I'mon blood pressure meds라고 하는 게 더 흔할 듯하다. 이게 여혐이라는 건 절대 아닌데.     


똑같이 관용적으로 사용되는 단어를 보자. Shopping. 물건을 구입한다는 행동인데, 이건 영어권에서나 한국에서나 '여자들의 옷, 장신구 구매활동'을 주로 가리킨다. 그래서 야채, 생필품 사는 건 '쇼핑'이 아니라 장보기이고, 영어로는 보통 'grocery shopping' 이다. 우리 솔직히 말해서 장보는 게 더 흔할까 옷 쇼핑 나들이가 더 흔할까? 영어권도 당연히 빵 사고 우유 사고 계란 사는 것이 신발 쇼핑보다 훨 흔할 듯한데도 쇼핑이라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여자가 생활에 꼭 필요하지는 않은 물품 사러 나가기다. 장 보러 가는 거 아니고, 옷이나 신발 사러 가는 거 아니면 I'm going to the shops / I'm going out to get xyz 라고 한다. Shopping이라는 단어는 잘 쓰지 않는다. 꼭 이 단어를 다른 컨텍스트에서 사용할 때는 목표물을 보통 더한다. They are on a shopping spree for value stocks. 주식 쇼핑한다는 말 뭐 이런 식으로.     


남자가 쇼핑하는 건 다른 단어를 쓰거나 표현을 달리한다. '덕질'이 한 예다. 내 남편은 돈을 많이 쓰는 건 아닌데 뭘 하나 사려면 진짜 몇 개월 몇 년을 온라인에서 정보 보고 비교하고 후기 읽고 찌질거린다. 난 이것도 쇼핑이라고 본다. 온라인으로만 그러는 게 아니라 주말에 무슨 핑계라도 대서 하드웨어 가게로 향한다. 그리고 진열대 앞에 서서 천하통일 고민하는 유비 못지않게 심각하게 끙끙거린다. 이걸 여자가 화장품 가게에서 하면 된장녀, 김치녀 소리를 듣는다. 여성의 소비 활동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욕먹는다는 얘기다.     


영어 단어 난무하는 김에 단어 하나 더. Patronizing. "잘 해주는 척하지만 결국은 무시의 정서"이다. 간단한 예로 "안 예뻐도 괜찮아! 뚱뚱한 애들이 성격이 더 좋잖아!" 등등이다. 이럴 때 버럭 하면 화내는 사람이 나쁜 사람 되는, 그런 아주 빡치는 말투. 이 정서가 쇼핑에도 있는데, 가계 지출의 80%(든 뭐든 하여튼 높은 퍼센티지)를 여자가 하니까 여자에게 잘 보여야 된다 그런 거다. 여자가 그렇게 돈을 다 컨트롤하니까 남자들이 설 자리는 없다, 혹은 남자가 엄청 열심히 벌어 온 돈을 여자가 다 쓴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건 덤이다. 그런데 가계지출을 보자. 전업주부든 워킹맘이든, 식료품 구입이 제일 흔할 거고, 애들과 남편 옷, 신발, 가정 필수품 등등. 정말 돈이 남아나서 맨날 자기 옷 쇼핑할 수 있는 사람들 제외하면 거의가 다 가계 관련 용품들이다. 즉, 살림과 육아, 남편 뒷바라지에 포함되는 소비활동이다. 즉, 남자가 해도 되는 소비 활동이다. 여자가 돈을 펑펑 쓰는 게 아니라, 귀찮아하는 남자 대신에 여자가 일 처리를 한다에 가깝다.     

때맞춰 애들 옷 신발 사는 것, 누가 하는가? 그게 벼슬인가? 마케팅 하는 이들은 속편한 여자들이 돈 가지고 나와서 쇼핑하는 걸로 생각하나 본데, 이거 일이다. 남편 속옷, 양말, 셔츠, 바지 사는 것, 그게 그렇게 즐겁고 재미있나? 벼슬인가? 때맞춰 샴푸, 린스, 비누, 로션, 타월, 세제, 하다못해 면봉 하나 휴지 몇 롤이라도 사는 건? 그게 그렇게 호화로운 쇼핑인가? 아니 다 필요 없고, 일주일에도 몇 번 봐야 하는 장. 가기 전에 뭐가 있나 확인하고 리스트 만들고 장 보러 가서 고르고 계산하고 들고 와서 정리해 넣고 재료 다듬고 밥할 것 정하는 게, 그게 그렇게 벼슬로 보이면 니가 다 하든가. 학습지 고르고 과외선생 찾고 학원 보내고 하면서 돈 쓰는 것도, 꼬우면 니가 다 하던가.     


결론. 

어딜 가나 여자가 돈 쓰면 욕먹는다. 내 돈 내가 사고 싶은 데에 써도 욕먹고, 무려 귀찮아도 해야 하는 쇼핑을 해도 팔자 좋음으로 본다.     


덧1: 

"여자지만 쇼핑은 별로 안 좋아해요"라고 나도 말하고 다녔다. 옷이나 신발, 가방, 장신구 사는 건 극도로 스트레스 받아하니까 거짓말은 아닌데, 이 말에는 "다른 여자들은 그렇게 (돈 낭비스러운) 쇼핑하는 거 좋아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아" 뉘앙스가 활활 풍긴다. 편하게 말할 수 없게 하는 이놈의 여혐 문화가 참 나도 피곤하다. 아니거든요. 옷, 장신구 쇼핑만 안 좋아하지 나도 다른 데엔 돈 펑펑 쓰거든요.     


덧2: 

여자가 쇼핑하는 동안 지쳐서 기다리는 남자들이란 사진 돌아다니는데, 참 ㅈㄹ도 가지가지다. 누구든 자기 관심 없는 거 쇼핑가면 재미없다. 남자가 시계 쇼핑가도 난 지겨울 거고, 골프용품점 가도 지겨울 거다. 너무 재미없어서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표정으로 사진 천 개도 찍어줄 수 있다. 여자만 돈 쓰는 거 좋아하는 것처럼, 그래서 돈 안 쓰는 남자가 사치하는 여자를 관대하게 봐주는 것처럼 개구라치지 말지?     


한 명 차단하고 덧:     

얼마 전까지는 정말 웬만하면 차단 안 하는 주의였는데 요즘엔 상당히 쉽게 차단 날립니다. 참고로, 심각한 성차별 얘기하는데 "남자 여자 친하게 지내요~" 하는 인간들 있죠. 어디 가나 비슷한 인간들이라, 영어권에서는 "why are you so angry? smile!" 왜 그렇게 화를 내? 세상은 네가 보기에 달라져 웃어봐~ 이따구 개소리하는 인간들 있습니다. 남자가 화내면 정당한 분노, 여자가 화내면 어머나 여자가 히스테리 부리네 <- 여혐에 화를 내는데 여혐 가득한 톤으로 화내지 말라고 함. Patronizing 단어 설명하는 글에 저렇게 patronizing 한 댓글 다는 것도 참 능력이다.


지겨워하는 남자들 사진 모음: 

https://www.instagram.com/miserable_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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