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22일
당신이 유럽 한 국가에 놀러 갔다. 꽤 유명한 관광지에 도착해 멋진 석양을 보며 혼밥 하고 있는데 껄렁거리는 애들 몇이 다가오더니 시비를 건다. 주위를 둘러봤지만 아무도 없었고, 걔네들은 당신 머리를 한 대 치고 카메라와 가방을 뺏어 도망갔다. 하필이면 여권 노트북까지 다 들어있었다. 당신은 근처 경찰서로 갔다.
"그런 데를 왜 혼자 다니고 그래요?"
"딱 당할 만했네."
"요즘 아시아계 관광객이 참 문제야. 그렇게 보이는 데다가 카메라 가방 들고 다니면 가난한 젊은 애들이 어떻게 참겠냐고요."
"덩치나 좀 크면 덤비지 않을 텐데 운동 안 해서 힘이 없으니까 더 타깃 되죠."
이런 얘기를 듣는다. 이것도 빡치는데, 진술받던 경찰관이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묻는다.
"진짜 강도당한 거 맞아요? 당한 사람 같지 않은데."
뭐라고?
"아니, 보험금 타려고 일부러 도둑맞았다고 하는 관광객도 많아요. 꼭 당신이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하는 게 말하는 꼬라지 보아하니 나 의심하는 거 맞다.
"얼마 들어있었다고요?"
물어보면서 위아래로 훑어본다. 니가 잃어봐야 뭘 잃었겠냐는 느낌이다. 여권이랑 노트북도 잃어버렸다고 하니까 -
"주의 좀 하고 다니시지. 왜 여권을 들고 다녀요? 노트북은 그냥 호텔에 두지 왜 갖고 나왔어요? 뭐 이건 털어달라고 사정하는 것도 아니고 쯧쯧. 당신 같은 사람들 때문에 선량한 사람들이 강도가 되고, 우리 경찰들도 피곤해지고 그래요."
확 그냥 다 불 질러버릴까 충동 든다. 하지만 진짜 열 받는 일은 그 다음.
지역 신문에 뉴스가 났다. "아시아 관광객 또 날치기당해" 이라고 떴는데 거기에 붙은 일러스트가 보니까 덩치 작은 아시아 사람이 엄청나게 큰 카메라와 그 외 소지품이 줄줄 흘러나오는 가방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그야말로 당해도 싸다는 느낌이다. 그 옆에 까만 복면 쓰고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는 도둑도 보이긴 하지만 메인 포커스는 '부를 과시하는 호구 아시아 관광객'이다.
하늘의 도움으로 그 강도들을 잡았다. 경찰서에서 대면했다. 강도들 부모가 왔다. 선처해 달란다. 싫다고 거부했더니 이제 욕설로 들어간다. "니가 그렇게 과시하고 다니니까 우리 착한 애가 잠시 해까닥해서 가져간 거잖아! 니가 그렇게 안 했으면 우리 애가 그럴 리가 없는데! 그래, 우리 가난하다. 가난해서 훔쳤다. 그게 죄냐? 그게 죄냐고?? 니가 우리 동네 와서 그렇게 과시하고 다니지 않았으면 이럴 일 없잖아! 그 상황에서 강도 안 할 사람이 어딨어? 너 우리 가난하다고 무시하냐?"
처음에는 허위 신고 같다고 의심받다가, 이제는 가난한 사람들 멸시하는 부르주아가 되었다. 창창한 남의 집 애 미래 망쳐놓을 인간이 되었다. 아니 여권 재발급 신청하고, 은행 카드 다시 만들고 엄청 번거로웠던 사람은 나거든요?? 내 노트북은 다시 찾지도 못했거든요?? 나보고 보험금 사기라고 하고, 순진한 동네 애들 범죄자 만드니까 좋냐고 하는데, 내가 이 멀리까지 보험금 타려고 날아왔겠니. 이 경찰들이랑 얘기하고 조사받는 게 즐겁겠니 나가서 맛집 도는 게 즐겁겠니. 이게 왜 어떻게 내 잘못이냐고. 그리고 신문 기사는 왜 하나같이 그따위야!! '카메라 부심 관광객 계속 털려'?? 그냥 똑딱이였거든!? 아니 근데 내가 왜 내 카메라 기종을 니한테 설명하고 있는 거냐고??
요즘 난독증 보이는 사람들 많습니다. 위의 글은 "니가 봐도 말 안 되지? 성범죄 피해자가 당하는 상황이 이렇게 말 안 되는 상황이야" 가 포인트인데, 저보고 "이건 말이 안 되는 상황인데 참 비유가 적절하지 않네요"하면 어쩌라고. 말이 안 되는 걸 알았으면, 그 말 안 되는 황당힘이 피해자들에게는 일상임을 깨닫고 '실제로 이런 황당한 경험을 하는구나'로 가야 하는데 이게 안 됨. 그리고 자기가 이해 못했음을 꼭 댓글로 공유로 셀프 박제함. 아고 나도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