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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gpa May 30. 2018

양파연대기

2016년 11월 22일

이거 딱 십 년 전에 쓴 글이네요. 스물여덟, 겨우 학사 끝내고 영국 이민은 생각지도 않았을 때예요. 이젠 잘 기억 안 나는 20대 초반 이야기 - 어떻게 IT 로 들어가게 됐는지, 어떤 일 했었는지, 어떻게 글 쓰게 됐는지 나름 자세하게 나와서 올립니다 (예전 블로그 정리중이에요 ㅋㅋ)




정외과였던 양파는 사실 컴퓨터 엔지니어링에서 전과한 거였답니다 (...) 알고 있긴 했지만 이렇게 정리하니까 저도 참 대책 없이 수습 못하는 인간이네요. 머 제대로 끝내는 게 없냐 -_-;

그런데 사실 첫 직장 프랭크 씨 만난 건 아주 큰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그 때문에 어쩌다가 컴퓨터 쪽으로 새어버리긴 했지만 말이에요.

방학 동안 알바 할 거 찾다가 신문에서 광고를 봤어요. 데이터 엔트리, 한 달에 3천랜드(40만 원 정도?). 오옷! 나 타이프 빠르니까 이런 거 잘 할 수 있어, 하고 이력서를 넣었는데 별 연락 없더라고요. 그래도 혹시나 해서 일주일에 두 번씩 전화하는 제가 불쌍했던지, 그 아줌마가 자기 동생 회사에서 사람 찾으니까 가보라고 했어요. 거기서 만난 분이 프랭크 씨.

프랭크 씨는 50대 중반을 갓 넘긴, BBC 시리즈물에 학자로 나올 만한 생김새의 회계사 출신 프로그래머셨습니다. 키는 엄청 컸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냥 제 기억 때문일지도 몰라요. 깡마른 분이 스트라이프 슈트를 곧잘 입으셔서 더 길쭉해 보이셨습니다. 20년은 된 듯한 네모난 안경에 새하얀 머리카락이 인상적이었고요, 무엇보다 차분차분한 목소리가 좋았습니다. 이 분은 참 특이했던 것이 작은 회계 소프트웨어 회사를 운영하면서 경험 있는 프로그래머는 절대로 뽑지 않았습니다. 고등학교만 졸업한 아이들에게 수학 테스트를 시킨 다음 수습 사원으로 고용하여 훈련하고 1, 2년 정도 후 그들이 떠난다면 또 신입을 뽑고 하는 식을 고집하셨습니다. 자기 자신이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프로그래머기 때문에 정식으로 교육받은 프로그래머보다 수학 머리만 있는 초보가 훨씬 낫다는 이론이셨죠(그렇게 말하니까 무슨 세뇌교육자같은 ㅡㅡ). 전 수준 낮은 남아공 수학 올림피아드 전국 100위 입상 출신이었기 땜에 만점 스코어하고 바로 채용되었습니다. 홋홋. (참고로 전 대학에서 첫 수학 시험 20점 받고 낙제했슴다. 제가 원래 아이큐 테스트 퍼즐 풀기 이런 건 잘 하는데 학교 공부 꾸준히 하는 건 못했어요.)

매일매일 출근하면 홍차 한 잔 타 줄까 물어보시고 제 차 한 잔, 우유 잔뜩 탄 자신의 차 한 잔 타서 책 상위에 내려놓으시고 천천히 의자에 앉아 기다란 손가락을 마주 대었습니다. 전 참 꼼지락거리기도 많이 꼼지락거리고 집중도 못 하는 애였는데 침착하게 또박또박 설명하시는 칼쓰마 앞에선 주눅이 들었더랬죠. 그렇게 일 년, Pick 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언어로 만든 POS 제네레이터(시스템 빌더가 상품명)를 파이선으로 다시 만드는 작업을 같이 했습니다. Curses를 이용한 인풋 시스템 파이선으로 쓰는, 그야말로 삽질을 했었죠(간단히 설명하자면 텍스트 파일을 읽어 들여 Curses를 이용한 스크린으로 띄우는, 그리고 스톡과 데이터베이스 관리를 하는 그런 시스템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저는 고객관리로 바빴던 프랭크 씨 대신 책 읽고, 어떻게 하는 건지 알아보고 하는, 비서에서 한 단계 진화된 그런 시다바리였던 거 같은데, 나름대로 즐거웠어요(이게 2000년 일이네요!!).

거기서 1년 일하는 동안 프랭크 씨는 제가 시작하기 전부터 이야기가 오가던 회사에 자문직으로 들어가시게 되었습니다. 개발한 시스템은 아직도 프랭크 씨 회사에서 쓰고 있는 걸로 알고 있으나 저는 프랭크 씨 떠난 회사는 별로 정이 가지 않더군요. 몇 달 고민하다 옮긴 회사에 몇 달 다니다가 외부 파견 근무 나가 있었던 신랑님 만난 거예요.


그 때, 전 세계에서는 닷컴 붕괴 이후로 IT 인력이 별로 안 귀하다고 했지만 남아공은 2001년, 2002년까지 천천히 무너졌거든요. 그래서 2002년 이직도 가능했습니다. 프로그래머로 2년 일했고, 자바 프로그래머 자격증 있다는 것만으로 덜컥 학과장으로 채용한 사람들도 참 무책임하긴 했지만 ㅡㅡa (사실은 웬만한 책임자들은 인력난에 싹 다 빨려 나가버리고 헤드쿼터가 휘청했다는 비극적인 사연이..) 뭐 그럭저럭 열심히 했어요. 컴퓨터 교육 전문대였거든요. 어떤 식이냐면 거기에서 디플로마 몇 개를 받고 난 다음에 영국 대학과 연계한 과정 1년 더 하면 컴사 학사가 나온다, 뭐 그런 거였어요. 제가 맡은 일은 웹 프로그래밍 관련 학과. 오래된 교과서 다시 쓰고, 새로운 과정 만들고(C#, 웹서비스, SMS 서비스 등) 강사들 관리하고 그런 일이요. 그런데 저 뭐든지 글이라면 빨리 쓰거든요. 위에서는 6개월 시간 주면 한 달 만에 스터디 가이드 다 쓰고, 시험이랑 강사 가이드랑 실습까지 다 끝내고 워크숍 역시 끝내게 되더군요. 그래서 거기서 일한 2년 동안 정말 시간 널널했습니다. 돌아보면 스터디 가이드 직접 쓴 것도 꽤 많고, 실습 문제 제출, 10개 캠퍼스 시험지 moderation, 강사 관리 등등 꽤 일 많았을 거 같은데 그 땐 진짜 널널했답니다.

딴 짓 하고 싶으면 영어 사이트 보면서 노는 것보다 한국어 사이트 보고 노는 편이 좀 덜 찔렸던 (...신랑님은 그 쪽이 더 표시난다고 하지만, 어쨌든 전 그랬어요. 남들이 뭘 보는지 이해 못한다는 데에...) 양파는 매일 신문만 읽다가 어느 날 소설 올라오는 사이트를 발견했습니다. 아니 이게 웬 떡이냐 하고 6개월은 열심히 읽었고, 그 다음에는 (지금도 모자라지만 그 때는 완전 호러 수준의 국어 실력으로) 직접 써보자는 미친 생각이 들어서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1년에 장편 소설 여섯 개 쓰고 얼떨결에 출판 제의받고 한 권 낸 다음에 개나 소나 다 출판해 주지는 않는....거겠지만 '개나 소나'의 범주에 들어가는 나도 책 낼 수 있구나를 깨달았다고나. 첫 책이 2003년에 나왔으니까 출판 결정했을 때 저 20대 초반이었네요. 스물둘. 하핫. 가명으로 내길 잘 했... orz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20대를 정리하자면..


학사 학위 하나 끝냈고

컴터 플그래머, technical writer/Head of Department, 지금은 QA 매니저로 일했고 

(모자라도 한참 모자라지만 어쨌든) 책 열 권 가까이 냈고 (이북 포함하면 더 되나) 

번역 (주로 한-영, 불-영)/통역 (영-한, 한-영) 일 좀 뛰어 봤고 

쓸데없고 돈 안 되는 거 공부 많이 했고 (글구 다 잊어버렸고 -_-) 

어학원 열심히 다녔고, 어학 관련 과목 많이 수강했고, 

결혼한 지 오년 차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주관적으로 좋게 봐주려고 해도 제대로 끝냈거나 뭐 딱히 하나 내놓을 만큼 잘 하는 건 없네요. 이것 저것 벌여놓고 수습 제대로 못하는 애라서 주위 돌아보면 한 우물만 제대로 판 친구들이 부럽습니다. 여행이나 공부나 하고 싶은 건 거의 다 하고 살긴 했지만 쭈욱 끝까지 한 게 없어요. 여행을 해도 특이한 곳을 방문했다거나 몇 달 작정하고 배낭여행 했다던가 그런 것도 아니고, 공부도 하나 깊게 파고 들어간 거 없고, 글도 그렇게 썼지만 늘지는 않고, 영어로 글 쓸 거라고 벼르면서도 업무 관계 문서 작업 이상을 안 하고, 그렇다고 하고 있는 분야에서 딱히 뛰어난 것도 아니고, 뛰어날 만큼 노력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러네요.




그리고 십년이 지났습니다. 저 때보다 오히려 에너지도 훨씬 덜하고, 꿈도 작아졌고, 배짱도 없어진 것 같긴 해요. 저 땐 참 열심히 공부하고 읽고 쓰고 했었는데. 여러분 그래서 20대가 중요합니다.


저 때 이후로 10년을 다시 정리하면.


블로그 그 이후로도 십 년 더 했고 -_- 

보험회사로 옮겨서 일 하다가 영국으로 왔고 

남편은 시작했던 스타트업 접고 영국 와서 취업했고 

애 둘 낳았고 

둘 다 석사 끝냈고 

애들 낳고 치우면서도 그래도 꽤 여행 많이 다녔고 

한국도 훨씬 더 자주 드나들었고 

블로그 때려치우고 페이스북으로 왔고 

내가 또 책 내면 사람이 아니라 개다 해놓고 또 하나 더 냈고 

지금 또 하나 더 내려고 준비하고 있고 


왈왈....왈왈..왈..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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