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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사 Nov 17. 2024

지축역: 이상스러운 골몰이 솟는 경계

경계를 답보하며 내면을 은유하기

'의주로'는 의주를 잇지 못한다. 의주를 잇지 못하는 도로를 '의주로'라 부를 수는 없다.

통일로 명명비 (2020년 9월 촬영)

의주로를 계승하다시피 한 신작로는 '통일로'로 명명되었다. 박정희 대통령 친필의 '통일로'가 새겨진 명명비는 여전히 서 있었다. 그 비석은 통일을 이루어 의주로 다시 나아가겠다는 이상(理想)을 머금고 있었다. 그 속에는 시대의 가치도 동봉되어 있었다.


의주로가 '의주로답지' 못하게끔 하는, '군사분계선'이라는 경계가 있다. 그 경계는 양 당사자들 서로만이 공인하지 않았다. 이는 도리어 경계의 존재감을 강화하였다.


통일로 명명비가 있는 서울 은평구 구파발역의 다음 역인 지축역은 경기도 고양시에 있다. 대한민국과 북한이 군사분계선이라는 실상 경계를 둔 것과 같이 경기와 서울도 경계를 두었지만 그 경계는 자유로이 넘나들 수 있다. 그 경계는 형체가 없어 3호선 전철을 타고 구파발역에서 지축역으로 갈 때 나는 그 경계를 보거나 만질 수 없었다.

지축역의 관리 기관 경계 표식 (2018년 3월 촬영)

지축역에 내렸다. 지축역은 관리 기관이 양분되어 있다. 이곳에도 양분의 경계가 있었고 그것은 볼 수 있기까지 하였다.


'지하철/철도청'이라 적힌 표식은 그곳에 관리 영역의 경계가 있음을 말하였다. 그 경계를 두고 '지하철'의 지축역과 '철도청'의 지축역은 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표지판에 적힌 서로 다른 서체의 '지축'이 단상(單像)으로 남았다.


그렇다고 지축역에 차가 서면 그 차의 반 갑절이 철도청의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은 아니었다. 혹여나 경계 지점에 승객이라도 앉아 있다면 그 승객의 육신을 두고 육신의 반 갑절이 철도청의 지축역에 위치한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돌연 그런 생각에 힘입어 경계 표식을 두고 머리를 '철도청의 지축역' 쪽으로 기울여 보았다. 이런 때 나라는 것이 어디에 있다고 할 수 있을는가 잠시 골몰하였다. 머리를 이고 있는 하체가 '지하철의 지축역'에 있으므로 내가 난동을 부린다면 지하철의 지축역에서 나를 조치해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위에서 바라볼 나의 경위도상의 위치는 철도청의 지축역인 것이었다. 내가 위치를 감각하고 인지하는 기관들은 머리에 들어 있는 것이기도 하니 내가 느끼기엔 아무래도 내가 난동을 부린다면 '철도청의 지축역'에서 나를 조치해야 하는 것이렸다. 


나의 생각은 그것대로 나만의 생각인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나를 조치하는 입장에서는 전자를 따르는 것이 적절하렸다.

지금, 나는 지축역을 답사한 일을 상기하며 그 감상을 작금의 상념과 혼합하여 글로 우려낸다. 만약에 내가 그런 이상스러운 골몰을 하였다면 그것은 필시 조금도 의미 없는 사업(事業)일 것이다. 다만 그런 골몰의 상황을 가정하여 보는 것은 조금이라도 의미 있는 사업일 것이다. 그 상황에의 나에게 각별한 동질감을 느끼는 나는 내면에 축적된 무의식을 은유한다.



낭만고양시 #001


철사

사진 철사


참고자료

고양군지. 1987. 고양군지편찬위원회.

고양의 지도 이야기. 2020. 고양문화원.

도시의 경계들. 2024. 아마추어 서울.

저는 왼손잡이도 AB형도 아니지만. 2021. 카라타치 하지메. 동양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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