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처럼 남아 있는 이십 세기의 유산들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
- 이상, '날개' 中
감수성 풍부한 문학 소년의 심금을 울렸던 작가 이상(李箱). 그의 대표작 ‘날개’의 첫 문장이다. 처음부터 소설의 한 문장을 인용한 이유는 바른대로 말하자면 작가를 향한 약간의 사심 때문이기도 하나, 이 문장을 아래와 같이 변형하면 지난 시대의 유산을 퍽 고상하게 표현하기에 적절한 문장이 되기 때문이다.
이십 세기는 지났고, 지난 지도 어언 이십여 년이다. 이십 세기는 우리 곁에 없게 된지 오래이다. 하지만 당대에 만들어진 ‘유산’들은 이십일 세기인 지금에도 ‘박제’처럼 남아있다. 지나간 시대가 그야말로 ‘박제가 되어 버린’ 것이다. 퍽 유치하지만, 아래 가사도 변형하여 보자.
사랑했던 사람은 곁에 없지만 / 사랑했던 마음은 남아 있어요
- 장덕, '님 떠난 후' 中
이십 세기는 곁에 없지만 박제들은 남아 있다. 그 세기가 기억나지 않는 나도 남아 있는 박제들을 통해 그 세기를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할 수 있다. 일종의 신조어로 ‘기억 조작’이로다. 공간에 남은 이십 세기의 ‘박제’들을 몇 가지 추려 보고자 한다.
나는 맨홀 뚜껑마저도 사진으로 남기곤 한다. 혹자는 속되게 별의 별 것들을 다 찍는다고 하는데 그 말에는 나도 동의한다. 허나 길을 걷다 보면, 간혹 이십 세기에 놓여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맨홀 뚜껑들을 종종 목격할 수 있는데, 이들에게서는 이를테면 더 이상 볼 수 없는 옛 휘장들을 살펴보는 것이 묘미이다.
<도판 1-1>은 서울 정동의 한 맨홀 뚜껑이다. 뚜껑에는 1947년 미군정 서울특별자유시의 상징으로 제정된 휘장이 나타나 있다. 원을 중심으로, 서울 도심을 둘러싼 산들을 형상화한 팔각이 특징인 이 휘장은 1996년까지 사용되었다. 이 휘장이 그려진 맨홀 뚜껑은 꽤나 많은 곳에 산재하여 서울을 걷다 보면 한 번쯤은 밟히곤 한다.
한편 <도판 1-2>와 같이 표지판에도 과거의 휘장이 남아있는 경우가 왕왕 있다.
물론 종전의 서울특별시와 같은 도시의 휘장뿐만 아니라 <도판 1-3>의 철도청과 같은 공공기관의 옛 휘장이 남아 있는 팻 말도 볼 수 있다. 서울 응봉역에서 포착한, 1963년 제정되어 1996 년까지 사용된 철도청의 휘장을 일례로 가져왔다.
표지판 등지에는 꼭 휘장이 아니더라도 과거의 유산을 으레 엿볼 수 있다. 이를테면 고양 토당동을 걷던 중, 1992년까지 존속하였던 ‘고양군’이라는 행정구역명이 표기된 안내판을 포착하여 바로 카메라 를 꺼내 든 일이 있다. 사진을 찍은 2024년을 기준으로 고양군은 삼 십이 년 전인 1992년에 사라진 존재이지만 그 박제만은 군데군데 남기고 사라졌다.
같은 토당동에서는 ‘삐삐’가 나타난 광고 표지판 또한 보았다. 이십일 세기 현재에는 사장되어 이름마저도 마주치기 힘든 문물이 광고 표지 판에는 남아 있었다. 이렇듯 사양길에 접어든 문물들이 남긴 박제를 표지판에서 찾아보는 것도 해볼 만한 일이다.
<도판 1-6>에는 ‘천리안’, ‘하이텔’ 등이 선도하였던 ‘PC통신’의 박제를 담아 보았다.
여행은 멀리 있지 않다. 시간은 미래로 나아가지만 박제들을 통해 과거로 역행해 보았다. 생경함을 찾아 나서는 여행이지만 집 앞, 늘 다니던 길, 속된 말로 ‘나와바리’에서 지금 세기와는 다른 생경함을 찾았다.
그런 ‘가까운 곳에서의’ 여행은 가능한 한 속히 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망각의 저편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이십 세기처럼, 그 박제들도 하나둘 ‘교체’, ‘철거’라는 운명을 맞고 있기 때문이다. 소리소문 없이 사라져 버린 구형 이정표처럼, 박제들의 말로에는 예고도 없다.
‘애국가’가 나오는 라디오를 뒤로 하고 외출하니, 새벽의 신선한 서 늘함이 나를 포옹하였다. 이슬 젖은 ‘무가지(無價紙)’ 뭉치를 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묶인 ‘전봇대’도 올려다 보았다.
윤동주(尹東柱)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이름들을 읊었다지. 나는 떠오르는 마알간 해에, 박제가 되어 버린, 박제로 만 만날 수 있는, 박제 덕분에 만날 수 있는 것들을 읊어 보았다.
오늘은 컴퓨터 대신 ‘원고지’ 위에 글을 써 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글 철사
사진 철사
참고자료
이상 선집. 2021. 이상. 더스토리.
문헌학자의 현대 한국 답사기 1. 2023. 김시덕. 북트리거.
한국 지방자치단체 도시 상징디자인의 역사와 실태 연구 : 서울시 사례를 중심으로. 2018. 임선영.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새로 제정된 서울 시휘장. 1947년 4월 3일. 동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