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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사 Dec 24. 2023

수색조차장, 일제의 '철도 특구'

'대륙 침략의 전초기지' 수색조차장 8km를 걷다

2019년부터 2023년까지 수색조차장 및 그 주변에 대해 곳곳에 투고한 내용을 하나의 글로 모았습니다.


"이번 역은, 디지털미디어시티역입니다." 


지난번 글에서 가좌역 일대에서 여정을 마쳤다. 가좌역의 다음역인 디지털미디어시티역. 이름도 길어 '디엠씨'로 줄여 부르는 이 지하철역에 많은 사람들이 내린다. 출구로 나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저벅이며 버스 정류장을 향한다. 그래, 다들 고양 아니면 파주로 향하겠거니, 여기 내리는 사람들이 백이면 백 다 거기 가는 사람들이겠거니. 대화동, 설문동, 삼송 같은 고양의 지명부터 교하지구, 가람마을 같은 파주의 지명들까지, 그리로 가는 버스들에 사람들이 올라탄다. 


이 일대를 통틀어 수색이라고들 많이 부른다. 6호선의 역 이름도 본래는 수색역이었다. 이십여 분, 서울에서는 다소 긴 시간을 기다리니 7726번이라는 노선이다. 노선도를 보니 '현천', '덕은', '항공대학교'등의 지명이 보인다. 모두 고양의 지명이다. 고양의 중심지와 서울 시가지 사이에 있는 작은 마을들로 향하는 노선인 것이다.  버스 기사와 승객들은 친해 보인다. 모두들 마을 주민 같다. 답사 목적인 나 같은 행자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고양 쌍굴

방대한 '물류 센터'의 일부


고양 쌍굴 (2019년 9월) 촬영

이번 정류소는 쌍굴 입구란다. 여기서부턴 고양이다. 나는 여기서 내린다. 쌍굴이라, 굴이 쌍으로 있어서 쌍굴이겠지. 정류장에 내리니 저 멀리 터널 하나가 보인다. 차 한 대 지나갈 만한 길을 따라 터널 앞으로 간다. 터널 앞 '쌍굴옻닭'이라는 식당까지 보니, 쌍굴은 이미 이 일대의 지명이 된 듯하다. 이름이 쌍굴이라는데, 터널이 쌍으로 있다는데, 다른 터널은 어디 있더냐. 터널 입구 오른편에는 고양이들이 살고 있다. 이 터널의 수호신마냥, 입구에 해치처럼 앉아있다. 고양이들 옆으로 조심스레 다가가 보니, 그제서야 다른 터널 하나가 보인다. "아, 여기 있었구나!". 내가 서 있는 곳보다 지대가 낮다. 반대로 생각하면 여기가 지대가 높은 것이지만. 아무튼, 그것보다 저곳을 어떻게 접근하냐가 문제이다. 이곳저곳 찾아보니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 있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터널 앞은 온통 늪이었다. 그래도 답사정신과 기록자 정신을 그 어떤 것이 이기랴. 나는 전진한다. 발이 푹푹 빠진다. 제길, 발목까지 젖어버린다. 그래도 나는 전진한다.

고양 쌍굴 (2019년 11월 촬영)

터널 입구는 판넬로 막혀있지만, 틈 사이로 눈을 집어넣는다. 얕은 구정물 위로 보이는 건 철길. 얼마나 오랜 세월이 흘렀는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이 터널이 사용 종료되던 당시의 철길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왜정 말에 일본군이 뚫은 터널이야."


쌍굴 앞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주민이 말했다. 이 터널의 정체를 알기 위해서는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물자전'이라는 말이 있고, "군대는 잘 먹어야 전진한다"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전쟁의 수행에서는 원활한 물자 보급이 중요하다. 일제는 1931년 만주 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장악하고, 1937년에는 중국 대륙을 침략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중일전쟁이다. 일제는 대륙 침략의 교두보로 한반도를 활용했고, 이를 보여준 것이 한국사 시간에도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병참기지화 정책'이다. 


1940년 1월 26일 자 동아일보에는 '삼대조차장건설'이라는 기사가 있다. 한반도의 세 곳에 조차장을 건설한다는 내용이다. '조차장'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나는 '물류 센터'라고 답할 것이다. 각지에서 모인 화물열차들을 분류하고 조성하는 곳이 조차장이니, 일종의 물류 센터라고 할 수 있겠다. 세 곳 중 하나는 바로 서울 수색에서 고양 화전 일대에 해당되는 지역으로, 현재의 경의선 가좌역에서 강매역까지에 이르는, 굉장히 넓다고 할 수 있는 면적이다. 고양 쌍굴 또한 그 방대했던 수색조차장의 여러 흔적 중 하나이다.


1945년 제작되어 철도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수색조차장배선실시약도'에서는 당시 이 조차장의 시설 배치를 엿볼 수 있다. 수색조차장에 관련된 기록과 흔적은 찾아보기가 힘든 상황에서, 이 배선도가 답사 여정에서 나름의 이정표 역할을 해준다. 현재 가좌역이 위치한 곳에는 '성산천 신호소'가 있었는데, 이곳은 본선에서 조차장으로 진입하는 분기점으로 남쪽에서 온 화차들은 이곳을 통해 조차장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그러고는 방대한 선로군들 위에서 분류 작업을 거쳤을 것이다. 한 눈에 봐도 복잡한 배선도에서 행선지별로 선로를 구분해놓은 것이 눈에 띈다. 행선지를 할당받은 화차들이 이곳에 대기하고 있었겠지. 


선형기관차고와 관사촌

아무도 모르게 사라져버린 철도 유산


수색역 선형기관차고 (1953년 촬영, ⓒDon Ross / 촬영연도 미상, ⓒ고양시청)


현재는 그 자리 그대로 철도 기지창과 비행장이 들어서 흔적을 찾아보기란 어려운 데다가, 이미 있었던 흔적마저도 사라져 없는 상태이다. 그렇게 사라진 유산들 중 하나가 바로 '선형기관차고'. 선형기관차고란 말 그대로 부채꼴 모양의 기관차 정비·보관 시설을 일컫는다. 선형기관차고의 존재가 생소할지도 모르지만, 일본에서 개봉하여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끈 영화 '스즈메의 문단속'에서도 주요 배경으로 등장하는 것이 선형기관차고이다. 국내에는 청량리역에 위치한 차고만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데, 그마저도 일부가 잘려 나가고 말았다. 이렇듯 철도 및 건축 유산으로써 가치가 있는 선형기관차고들은 2000년대 초반을 전후하여 아무도 모르게 철거되어버리고 말았다. 현재 부지는 야적장으로 전용되어 그 흔적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지만, 그래도 다행인 것은 누군가가 이 모습을 기록해두었다는 것이다. 당시에 큰 의미를 두었든 아니든, 해두었던 기록이 먼 훗날 나와 같은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되어주고 있다.

수색역 일대 항공사진 / 한국항공대역 일대 항공사진 (1947년 촬영, ⓒ국토지리정보원)

한편 군인들에게 관사가 주어지듯, 일제강점기 철도 직원들에게도 관사가 주어지곤 했다. 이러한 관사들은 꽤나 많은 곳에 위치하였으나 개발의 바람으로 대부분 헐려 끽해야 구획 정도만 남아있는 경우 뿐이다. 일제 강점기의 종식으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947년 항공사진에서는 수색역 부근에 인위적으로 조성된 듯한 격자형 구획이 나타나는데, 그곳이 철도 관사촌에 해당한다. 2020년 초 남아있는 철도 관사의 흔적을 찾으러 수색역 철도관사 부지 일대로 발걸음을 옮겼던 기억이 있다. 개발의 바람을 맞아 공사장이 된 그곳에는 한 채 남았던 가옥 또한 있었다고 한다. 큰 소득 없이 발길을 돌렸다. 한편 인접한 한국항공대역 부근에서도 위와 같은 격자형 구획이 나타난다. 수색역 부근의 그것과 달리 가옥은 지어져 있지 않은 모양이다. 기록이 없으니 섵불리 판단할 수는 없지만, 그 구획이 매우 유사한 것으로 보아 한국항공대역 일대에도 관사촌 건설이 시도되었던 것 아닐까 추측해본다.

상암동 일본군 관사 (2020년 3월 촬영)

수색역에서 철도 기지창을 건너면 2000년대 방송·문화 산업이 집중되어 조성된 '디지털미디어시티'와 함께 아파트 단지들이 나타난다. 그곳에는 생뚱맞게 오래되어 보이는 일식 가옥이 한 채 서 있는데, 이는 일본군의 관사라고 한다. 상암동 일대의 개발이 이루어지며 유수의 일식 가옥들이 조명을 받았는데, 그 중 두 채를 이전 복원하였다고 한다. 


그 당시 관사에서 살던 이들은 어떤 생각을 하며 지냈을까. 두 관사촌을 잇는 다리인 수색교 위에 서서 잠시 사유에 잠겨 본다.


전차 진로 방해용 시설

'군사 도시'의 흔적


고양 쌍굴의 '용치' (2019년 9월 촬영)

고양 쌍굴 중 아랫쪽 터널의 반대편 갱구에 왔다. 이곳 역시 풀숲을 파헤쳐야만 접근할 수 있다. 이끼와 덩쿨로 가득한 터널 축대. 터널 안에는 더 많은 양의 구정물이 차 있다. 선로도 물에 잠겼다. 여름날이라 모기도 기승이다. 모기가 문 다리에는 곳곳에 피가 흐를 정도이다. 이곳에서는 '용치'라 불리는 사진과 같은 구조물이 보인다. 이것은 전차 진로 방해용 시설의 일종으로, 터널이 본 목적을 상실한 이후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더 이상 안 쓰는 통로니 길을 막아놓아도 큰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덕은동 대전차 방호벽 (2023년 1월 촬영)

주요 도로와 철도 위에는 기둥을 폭파시켜 진로를 차단하는 대전차 방호벽이, 나머지에는 만리장성을 연상시키는 방벽이 서울을 지키는 모양으로 축조되어 있다. 구파발 일대에 있던 동일한 구조물은 개발의 바람으로 철거된 반면에 이곳은 그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서울에서 고양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타면, 수색에서 잠시 멈춰 검문이 이루어지곤 했지."


이러한 요소들은 해방 이후에도 수색조차장 일대의 군사도시적 성격이 그대로 이어졌음을 알게 해준다. 분단과 전쟁 이후, 최전방에서 서울로 향하는 직전 길목에 위치하였다는 지리적 특성은 이 일대를 다시 '군사도시'로 만들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대륙으로 향하기 위한 교두보로써, 냉전기에는 공산진영의 확장으로부터 수도를 지키는 방어선으로써 이 일대는 발전하였다. 이외에도 육군 부대, 비행장, 도로 이름으로 붙여진 '화랑로' 등은 이러한 분위기를 강화시킨다.


덕은동 대전차 방호벽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화전동 183-38


이외의 흔적들

나만의 추측이니 신중해야겠지만


화전동 710-1 일대 (2019년 11월 촬영)

이외에도 수색조차장의 흔적으로 추정되는 곳이 몇 있다. 화전동 710-1 일원에는 주변보다 지대가 높은 비포장 도로가 하나 있는데, 지적도에서 철도 부지로 나타나며 1967년 항공사진에서도 선로가 걷힌 철둑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철도 노반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화전동 863-3 일대 항공사진 (1967년 촬영, ⓒ국토지리정보원) / 동일 지역의 현장 사진 (ⓒ경의선 모임 - 분단 풍경)


앞서 언급한 항공사진에서 노반으로 추정되는 비포장 도로는 하천과 만나는데, 그곳에서 철도 교각의 모습이 포착된다. 해당 교각을 담은 현장 사진도 입수할 수 있었다.

적개고개 일대 항공사진 (1967년 촬영, ⓒ국토지리정보원) / 동일 지역의 현장 사진 (2019년 11월 촬영)

그 길은 하천을 넘고 계속 이어져 강매역 남쪽까지 향하는데, 강매역이 있던 자리는 수색조차장에서 조성을 마친 화차들이 본선으로 합류하는 지점인 '능화 신호소'가 위치하였던 곳이다. 적개고개라 불리는 고개에서 곡선을 그리며 본선과 합류하는데, 1967년 항공사진에서도 합류하는 선형이 뚜렷하게 보인다. '해포길305번길'이라고 이름 붙여진 길이 바로 합류하는 선로가 있었던 곳일 것이라 추측해본다. 어쩌면 그곳에서 만난 연식 있어 보이는 축대도 흔적 중 하나가 아닐까. 기록 없는 나만의 추측이니 신중해야겠지만.


능곡역

미궁 속의 이야기들


수색조차장에 대해 조사하던 중 입수한 자료들을 공유한다.


1967년 및 1975년 경의선 능곡역 일대 항공사진에서 능곡역 서북쪽, 철도의 선형을 갖추고 있는 구획이 발견되었다. 항공사진이 촬영된 당시 시점에도 이미 선로는 걷혀져 있는 상태였다. 위와 더불어 지적도상으로도 해당 구획은 철도 부지로 지정되어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구획은 능곡역 서북쪽 능곡초등학교 부근에서 경의선으로부터 분기하여 동쪽으로 꺾어 지금의 별빛마을 9,10단지 및 고양경찰서 일대에서 끊기는 형태이다.

능곡역 일대 항공사진 (1967년, ⓒ국토지리정보원) / 토당동 826-54 일대 현장 사진 (2019년 10월 촬영)

2019년에 현장을 답사해본 이후로 별다른 소득이 없었으나, 2년이 흐른 2021년 실마리를 찾아줄 한 자료를 입수하였다. 

출처: 한국 근대기 철도공장건축 연구 - 이상행 (경기대학교 일반대학원)

 논문 '한국 근대기 철도공장건축 연구'에서 발췌하였으며 철도박물관에서 소장중인 '능곡공장 평면도'. 철도차량의 제조와 정비를 담당하는 공장으로 보인다. 과연 그 의문의 구획은 철도가 맞고, 그 끝에는 철도 공장이 있었던 것일까. 한정된 자료에 진실은 미궁 속에만 갇혀있을 뿐이다. 

증언자가 약도로 재현한 능곡역 철도관사의 배치

능곡역은 수색조차장 '철도 특구'의 연장선으로써 기능했던 곳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2020년에는 수색역과 같이 철도 관사가 존재하였다는 증언 또한 확보하였다.


"능곡초등학교 정문 우측에 있었어요. 저는 70년대까지만 알고 그 이후는 잘 몰라요. 집은 일자형으로 같은 구조로 두 가구씩 붙어 있었어요. 저희 집은 역장 집이고 붙어 있는 옆집은 조역집이었어요. 띠엄띠엄 떨어져 있었는데 민가는 없었고 관사만 여섯 채 전부 열두 가구가 산 셈이에요. 관사가 없어진 건 아파트 들어서고나서일꺼에요. 집 구도 대략 그려 봤습니다. 1960년대 초반 기억입니다. 아버지가 능곡역 역장으로 재직하셨습니다."


허나 이 또한 미궁 속에 빠져있긴 마찬가지이다. 철도 관사와 관련된 추가적 증언을 얻기는 어려웠고, 마땅한 문헌 자료 또한 존재하지 않아 위의 그것과 같이 미궁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마치며


경성조차장 제3공구 내 무연합장지묘 (2019년 11월 촬영)

항공대학교 뒷편에는 공동묘지가 있다. 이곳에는 한 비석이 있는데, 비석에 적혀있는 내용을 보니 수색조차장에서의 무연고 시신들을 합장한 묘란다. 봉분과 묘비도 제대로 갖추어 지지 않고 번호만 적혀 있다. 수색조차장 부지에 있던 묘들을 이장한 것이라는 설도 전해지고, 강제징용 노동자가 묻혔다는 설도 전해진다. 어쩄거나, 이곳에 묻힌 이름 모를 영혼들은 누구였을까. 그들을 알아줄 날은 언젠가 반드시 찾아오리라.


단순히 그 뿐만이 아니다. 이 비석을 넘어 수색조차장 일대를 발로 걸으며 묘한 생각에 잠겼다. 일제의 중국 대륙 침략과 병참기지화 정책이라는 근대사의 격동적 소용돌이 속 역사의 산물이 우리가 사는 공간에 함꼐 존재한다는 점이 인상깊다.


공간기록

살아가는 공간에서 가치를 찾고, 그 유산들을 기록해나갑니다.


글 철사

사진 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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