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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사 Jan 28. 2024

신문지부터 간판까지

일상에서 시작하는 공간 기행

공간기록 - 001


어느 새벽의 영감


능곡초교 정류장 (2019년 10월)

2019년, 동네 시외버스 정류장 주변의 상권을 찾아가 볼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익숙했던 풍경은 보이지 않았다. 주변의 상가는 모두 철거되고 매표소 역할을 하던 가판대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늘 영원할 것만 같았던 풍경이 어느새 사라져 있는 것이었다. 공간의 변화를 당장 느끼기란 쉽지 않지만, 풍경은 가랑비에 옷 젖듯 변한다. 변화의 흐름속에서 매일 그곳을 지나다닐때는 그 흐름을 느끼지 못하지만, 지나고 나면 수많은 요소들이 변해 있고, 그것이 쌓여 어느새 '상전벽해'가 되어 있었다. 뒤로, 비록 내가 학문적 조예가 있는 전문가도 아닐지라도, 내 주위의 모습들을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2020년부터 정말 많은 곳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남긴 것 같다. 하지만 한 가지 고민거리는 이 많은 답사들을 어찌 정리할 것인가이다. 그래서 2024년 1월 타이베이를 마지막으로, 답사는 잠시 멈추고 그동안의 답사들을 글로 우려내는 시간을 갖기로 하였다. 당장의 글 한 편은 쉽게 써내려갔지만, 앞으로 해나갈 연재의 대략적인 구성에 대해 고민이 있었는데, 내 마음에 가장 이끌리는 방식은 작은 공간부터 우려내는 구성이었다.

이런 영감은 어느 새벽에 얻은 듯하다. 싸늘한 거리를 홀로 걷다, 전봇대에 꽂혀 있는 '벼룩시장'이라는 이름의 신문을 보았다. 문득 머릿속에는 우체통, 공중전화 부스, 버스 정류장, 가판대 등이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인도 위에서 자주 볼 수 있지만 크게 관심갖지는 않거나, 점점 사라져가기도 하는,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것들이 내 머릿속에서 하나로 묶이기 시작했다. 아무튼 본격적인 공간 기행문을 쓰기에 앞서 가볍게 첫 시작을 해 본다.


공중전화


고양 관산동의 공중전화 부스 (2023년 10월) / 고양 행신동의 공중전화 부스 (2023년 9월)

마지막으로 공중전화를 사용해 본 순간은 언제였을까. 누구나 휴대 전화 하나씩 소지하는 시대가 점차 도래하며 공중전화는 설 자리를 잃고 있다. 그런 공중전화가 다시 제 역할을 한 순간은 2018년 KT 아현지사 화재 때이다. 무선 통신망의 마비로 서울 번화가의 지하철역에서는 공중전화의 전성기마냥 사람들이 공중전화 앞에 줄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고양 행신동의 공중전화 부스 (2023년 11월)

위와 같은 상황이 아니더라도 예를 들어, 휴대 전화가 방전되는 등의 상황에서, 공중전화는 구세주가 되어 준다. 이제 공중전화는 '불편한 옛 문물' 이라고 여겨지며 도시의 애물단지 취급을 받기도 하지만, 그들은 일종의 반창고처럼 긴급 처방을 해줄 수 있다.


우체통과 우편함


고양 행신동의 우체통 (2023년 9월) / 파주 연풍리의 우편함 (2023년 10월)

우표를 꾹꾹 눌러 붙인 봉투를 던져 넣는 우체통도 공중전화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없어지는 듯하다. 반대로 우편물을 수신하는 우편함은 우체통에 비해 여전히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발신과 수신, 마치 연인과도 같아 보이는 기능을 지닌 각각의 문물은 서로 다른 운명으로 향해가고 있다.


맨홀 뚜껑


서울 정동의 맨홀 뚜껑 (2023년 10월)

서울 정동을 걷다, 맨홀 뚜껑을 보고 사진 한 장을 남겼다. 1947년 제정되어 1996년까지 사용된 서울의 휘장이 눈에 띄었기에. 강산이 수어 번 바뀌어도, 보도 블럭이 수어 번 바뀌어도, 꿋꿋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에. 도시의 변화를 눈으로 지켜봤을 맨홀 뚜껑이 전하는 무언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기에.


종종 서울과 인접한 위성도시에서도 저 휘장을 지닌 맨홀 뚜껑이 보이곤 한다. 타향살이를 하게 된 경위는 알 수 없다. "너는 어쩌다 이곳에 오게 되었니." 맨홀 뚜껑에게 묻지만 그는 답을 할 수 없다.


간판


파주 연풍리 '파주수퍼' (2023년 10월)

무언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것은 간판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어떤 무언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을까. 파주 연풍리를 걸으니 오래된 수퍼마켓 간판들이 보여 사진으로 담았다. 양옆에 붙은 탄산 음료의 상표는 이미 빛이 바랠 대로 바래 있었다. 이 간판들도 새로이 설치되었던 시절이 있었겠지. 

고양 행신동 '동성수퍼' (2023년 9월)

그들에게 말을 건네보았다. "내가 사는 동네에는 수퍼마켓들이 전멸했다시피 해. 여기까지는 아직 편의점의 공세가 들어오지 않는구나." 저 멀리서부터 밀려오는 공세의 소식을 들은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그들은 말할 수 없으니, 나도 그들의 생각을 들을 수 없다.

고양 토당동 '아름컴퓨터크리닝' (2024년 1월)

마지막으로 가볍게,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들려주고 끝낼까 한다. '컴퓨터크리닝'이라는 간판을 단 가게는 컴퓨터를 세탁하거나 수리해주는 곳이 아님을 누군가는 이미 알고 있을지도, 또 다른 누군가는 이 글을 보고서 알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세탁소 상호에 흔히 들어가는 이름인데, 아무래도 자동 세탁기를 일컫는 말로써 '컴퓨터'라는 단어를 붙인 것으로 보인다. 간판 가지고도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정말 많다.


그들을 헤는 새벽


새벽녘 글의 영감을 떠올리며 걸으니 어느새 동쪽 하늘에서 해가 빛을 내뿜기 시작한다. 나는 그 해 하나에, 길거리를 걸으며 보아왔던, 가랑비에 옷 젖듯 점차 사라져버려도 모를 것 같은, 인도 위에서 자주 볼 수 있지만 크게 관심갖지는 않거나, 점점 사라져가기도 하는,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것들, 그럼에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들을 읊어 본다. 어떤 이에게는 그들 하나하나에 추억과, 사랑과, 쓸쓸함과, 동경이 담겨 있을 터이니, 강산이 수여 번 변하여도, 그것들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지라도, 나는 그것들을 어느 것을 통해서든 남겨두고 기억할 거외다.



공간기록

살아가는 공간에서 가치를 찾고, 그 유산들을 기록해나갑니다.


글 철사

사진 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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