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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사 Feb 04. 2024

철창부터 중정까지

잿빛 도시에 색을 더해 주는 장신구들

공간기록 - 002


수수함과 칙칙함


타이베이 용산사 부근 (2024년 1월)

아마도 출근 시간이 막 지났을 때였다. 전철역은 폭풍이 이미 지나간 듯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하늘은 흐릴지언정 중천으로 향해가는 해는 도시를 밝혀놓았고, 그 아래 상인들은 아침 장사를 이어오고 있었다. 타이베이의 오전 9시 또한 서울의 그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그러한 아침 모습을 뒤로하고, 국철 완화역(萬華車站)에서 남동쪽으로 걸어 골목에 들어선다. 이 골목은 본래 신뎬선(新店線)이라 불리는 철길. 기차가 다니던 자리는 골목이 되어 자동차가 다닌다. 


골목을 걸으며 본 대만의 건물들은 대체로 구리고 칙칙하다. 연중 습윤한 기후로 인해 외장을 가꾸어도 비와 습기에 의해 얼마 되지 않아 원래 상태로 되돌아 온다는 것이 흔히 들을 수 있는 설명이다. 또한 번지르르한 겉보다 내실을 중요시하는 문화적 특성 또한 복합적으로 작용한다지만, 정확한 이유는 알기 힘들다. 좋게 말하자면 대만의 건물들에서 담백함과 수수함을 느낄 수 있지만, 대체로 허름한 외관을 지닌 것은 사실이다.


철창


타이베이 완화역 부근, 옛 신뎬선 철길 (2024년 1월)
타이베이 완화역 부근 (2024년 1월)

그런 대만의 건물에는 꼭 철창이 달려 있다. 주민들은 이 철창에 빨래도 널고, 실외기나 화분 같은 것들을 가져다 놓기도 하는 등 유용하게 활용한다. 


이 특유의 철창은 한때 철창화(鐵窗花), 또는 철화창(鐵花窗)이라 하여 예술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대외 국제방송인 라디오 타이완 인터내셔널(Radio Taiwan International)에서 이에 대해 소개한 적이 있었다. 철창화는 기하학적 무늬나 동식물의 모양으로 만들어진 철창을 의미하는 것으로 일제 강점기부터 1980년대까지 유행하였단다. 철창화라는 존재를 두 눈으로 보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타이베이를 걸으며 만난 철창들은 각자의 개성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 멀리서 보면 밋밋하지만, 가까이 봐야 예쁜 풀꽃 같은 존재였다.


화분


타이베이 완화역 부근 (2024년 1월)

한편 나에게 눈에 띈 것은 철창에 가져다 놓은 화분이었다. 가정집 철창에서 만난 화분은 '잿빛 도시' 타이베이에 색을 불어넣어줬다. 어쩌면 화분은 가장 쉽게 공간에 다채로움을 더해주는 요소 아닐까. 흔히 도시는 회색의, 잿빛의, 칙칙한 등의 단어들로 묘사되곤 한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파릇파릇함을 피어내는 식물들을 본다면, 아니면 흙을 담고 있는 화분들을 본다면, 도시는 더 이상 회색이, 잿빛이 아니며 칙칙하지 않다. 

고양 행신동 (2024년 1월)

한국에 돌아와, 순전히 공간의 세세함에 집중하며 오래된 빌라 사이를 걸었다. 빌라 앞 화단에는 크고 작은 화분들이 놓여 있다. 화분들은 타이베이에서 만난 그들처럼, 작지만 큰 힘으로, 도시의 장신구가 되어 주었다.


텃밭과 나무


고양 행신동 (2024년 1월)

골목을 걸으니 화분을 넘어 조그마한 텃밭을 조성해 놓은 경우도 눈에 띄었다. 공동 주택이라는 거주 공간의 양식에서도 마당에서 텃밭을 가꾸던 습관이 그대로 유지됨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로운 대목이었다. 

고양 행신동 (2022년 5월)
고양 행신동 (2023년 9월)

밭은 길러 먹기 위한 작물을 키우는 곳이지만, 잎이 파릇파릇한 때에 구경하면 하나의 미적 요소가 되기도 한다. 자투리 공간의 소소한 텃밭 하나 잘 가꾼 정원 안 부럽다. 어떻게든 텃밭을 가꾸려는 불굴의 텃밭 정신은 도시에게 또 하나의 장신구를 만들어 주었다.


텃밭에 자란 잎이 파릇파릇할 때 골목을 걷다 보면, 화단 등에 심어진 나무들도 미적 요소가 된다. 앙상한 가지만 남았던 겨울이 지나고 개나리, 벚꽃과 같은 꽃들이 피는 봄날부터, 푸른 잎의 여름날과, 붉고 노란 잎이 조화를 이루는 가을날까지 말이다. 그 중 나는 여름날 이곳을 걸었던 기억을 다시 떠올려 본다. 키 작은 꼬마 빌라 옆에 서 있는 나무, 귀를 찌르지만 어느새 익숙해진 매미 소리, 평상 위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주민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그 날에 직접 걷지 않고서 말로는 오넌히 재현할 수 없는 감성이다. 따스함을 풍기는 봄꽃이 핀 모습과 색색의 낙엽들이 우수수 떨어지는 가을날의 모습 또한 나쁘지 않다.


흔히들 자연과 함께하기 위해 먼 곳의 산이나 농촌을 찾아가곤 한다. 그것도 좋지만, 도시민들과 가까운 곳에서 그들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이런 장신구들이 있음을 알아 주기를.


중정


서울 영등포동5가 '동남아파트' (2023년 11월)

서울 영등포 '동남아파트'. 중정이 인상적인데, 중정이라는 공간이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숨겨진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화분과 같은 미적 요소들이 눈에 띄었다. 화분을 가져다 놓은 이가 화분에 큰 의미를 부여했을지는 모르지만, 나는 겉으로 보이지 않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무언가를 가꾸어 놓은 것이 인상 깊었다. 

서울 영등포동5가 '동남아파트' (2023년 11월)

보여주는 목적이 아닐지라도 자신을 가꾸는 것. 그것이 중정에서 얻은 나에게로의 교훈이다.



공간기록

살아가는 공간에서 가치를 찾고, 그 유산들을 기록해나갑니다.


글 철사

사진 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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