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마]
우리는 럭키가이
희망의 빛이 점차 희미해지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기쁜 마음에 호흡을 한번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서비스센터 직원이 수화기 너머로 말하기를, 한국 국적 번호를 알아내려고 다른 번호로 계속 연락을 하느라 늦었다고 말했다. 서비스센터 직원이 +82가 아닌 +81로 착각하는 바람에 곧바로 전화가 오지 않았던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직원은 우리에게 연락을 취하기 위해 번호를 바꿔가며 시도한 모양이다.
환호할 틈도 없이 우리는 즉시 체크인 데스크로 달려갔다. 항공사 서비스센터 직원이 전화 통화를 원한다고 설명하며 데스크 직원에게 핸드폰을 건네주는데, 그 직원은 계속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하며 전화를 받지 않으려 했다. 우리는 답답한 마음에 손짓 발짓을 써가며, 최대한 간절한 표정으로 데스크 직원을 설득했다. 끈질긴 설득 끝에 결국 그 직원은 탐탁치 않은 표정을 지은 채 전화를 받았다. 유선상으로 몇 분 동안 대화가 오고 갔다. 데스크 직원은 사무적인 태도로 전화를 받으며 컴퓨터로 무언가를 분주하게 입력하더니 이윽고 핸드폰을 우리에게 돌려주면서 웃으며 말했다. “성공적으로 해결됐어요.” “오오…! 와아아아아! ...살았다..!”
항공사 서비스센터 직원과 마저 대화를 나누고 전화는 종료되었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니 S와 통화했던 서비스센터 직원께서 우리 이름으로 항공권을 새로 예약해주었고, 심지어 그 어떠한 비용도 발생하지 않도록 신경 써주었다고 했다. 이리하여 리마에서 하루 숙박을 한 뒤 다음날 오전에 아바나로 떠나는 것으로 여행 일정이 재설정됐다.
너무나도 아찔했던,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아슬아슬한 줄타기였다. 지금 생각해봐도 도무지 이해할 수도 없고,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항공 일정을 착각해 비행기를 놓친 건 명백히 우리의 잘못이었기 때문에 수수료를 지불하고서라도 추가 비행기를 예약하려고 했는데, 취소 수수료도 없이 무사하게 쿠바로 갈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우리 입장에서는 그저 행운의 여신이 빙그레 웃으면서 선물을 준 것에 대해 감사할 따름이었다.
2시간 동안 필사적인 노력 끝에 다시 웃음을 되찾을 수 있었다. 우리가 2시간 동안 사투를 벌인 항공사는 아비앙카(Avianca) 항공이었다. 우리를 위해 힘써주었던 아비앙카 서비스센터 직원은 어쩌면 천사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누가 봐도 우리의 잘못으로 인해 초래된 상황임에도 그녀는 시종일관 친절한 태도로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문제를 해결하여 우리가 여행을 계속 이어 나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우리는 그녀의 이름도 모르고, 다시 만날 수는 없겠지만, 앞으로 행운과 축복이 그녀의 삶에 가득 깃들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바이다.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고자 출국 수속을 마친 후 카페에서 음료를 마시며 기운을 회복했다. 예기치 못한 사고에 우리 네 명 모두 얼굴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는데, 다크서클이 턱 아래까지 내려왔고, 진이 빠진 상태였다. 그 중에서도 통화를 맡았던 S의 얼굴이 가장 초췌하고, 피곤해 보였다. 우리는 잠시 혼이 빠져 나간 듯 몇 분 동안 멍하니 앉아 있다가 음료를 홀짝이며 리마에서 묵을 숙소를 물색했다. 그래도 여행 3주차에 접어드는 우리는 제법 능숙하게 숙소를 구했다. 이제 이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다소 시간이 지나서는 서로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을 정도로 체력과 정신력이 돌아왔다.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후 잠잠해진 바다 위를 떠다니듯 느긋하게 휴식을 취했다. 긴장이 풀리자 얕은 졸음도 솔솔 몰려왔다. 푹 쉬면서도 우리가 탈 비행기 시간만큼은 철저하게 확인했다. 어렵사리 잡은 기회를 다시 놓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했기에.. 그렇게 시간을 확인하다가 천천히 게이트로 걸어갔다.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오다
리마에 도착했다. 3주 만에 다시 이곳으로, 남미 여행의 시작점이었던 곳으로 돌아왔다. 밖은 이미 어두웠고, 택시기사들은 자신의 차에 관광객을 태우기 위해 열심히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남미여행 3주차인 우리는 페루에서 제법 택시를 많이 타봤기에 택시기사의 호객에 이끌려 가면 호갱이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택시기사가 우리에게 탑승을 제안하며 가격을 불렀고, 우리는 그 가격에 절반을 요구했다. 이들이 높은 금액으로 택시 요금을 부른다는 걸 알고 있었고, 어차피 주변에 널린 게 택시기사였기에 흥정에 실패하면 다른 기사를 찾아가면 됐기에 우리는 아주 당당했다. 그러자 그 기사는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결국 그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공항에서 30분 정도 이동했는데, 택시기사가 잠시 으슥한 갓길에서 차를 멈추더니 숙소 주소를 보여달라고 했다. 주소를 보고 골똘히 생각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우리는 그가 주소를 착각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더니 그는 숙소 주인과의 통화를 하고 싶다고 요구했다. 몇 분간 통화가 이어진 다음에서야 차가 다시 움직였다. 10분 정도 더 이동해 숙소에 도착했다. 택시기사가 차에서 내리더니 숙소 주인에게 뭔가를 말하기 시작했다. 숙소 주인이 우리에게 말하기를, 이 기사가 처음보다 먼 거리를 왔으니 추가요금을 받아야겠다고 했단다. 처음에 25솔을 받겠다고 했지만, 40솔을 요구했다. 지가 주소를 착각해서 길을 잃어 놓고 빙빙 돌아온 건데 뻔뻔하게 추가요금을 요구하다니..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이미 한차례 큰 사건을 겪은 터라 언쟁할 힘도 남아있지 않았고, 여기서 거절했다가 자칫 운이라도 나쁜 경우에 해코지를 당할 수 있었기 때문에 결국 추가요금을 주고 숙소로 들어갔다. 고작 몇 푼 아끼려다가 해를 입는 건 너무 억울하니까
푸근한 사장님 부부의 맛있는 안티꾸초 로컬 맛집
저녁 먹을 곳을 찾기 위해 대로로 이동하던 중 외관은 평범한 가정집인데, 가게 문 밖에서 푸근하게 생긴 아저씨가 안티꾸초를 굽고 있었다. 우리는 무언가에 홀린듯이 그곳으로 들어갔다. 메뉴판을 보고 싶다고 말했지만, 아주머니께서 메뉴판은 따로 없고, 안티꾸초와 치차론만 판다고 하셨다. 우리는 안티꾸초 2꼬치와 치차론, 맥주를 주문했다. 가게에 있는 맥주가 미지근했는지 갑자기 아주머니께서 옆 가게에서 가시더니 맥주를 가지고 왔다. 우리 테이블 옆에서 주인 아저씨는 정성을 다해 안티꾸초를 굽고 있었고, 맛있는 냄새가 좌악 퍼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먹었던 안티꾸초 중 가장 맛있었다. 고기도 큼직하고, 갓 구워 내서 불향도 진했고 풍미가 아주 다채롭고 훌륭했다. 소고기 특유의 퍽퍽함이 느껴졌지만, 담백하고 고소한 맛이 일품이었다. 치차론은 스페인어로 돼지 비계를 의미하는데, 우리가 받은 건 아주 먹음직스럽게 구워진 돼지고기였다. 겉으로 보기엔 삼겹살을 두툼하게 썰어 기름에 튀긴 것처럼 보이는데, 식감은 돼지고기 수육처럼 부드럽고 담백했다. 우리나라에서 판매해도 충분히 잘 팔릴 것 같은 메뉴였다. 맥주와 먹기엔 치차론이 더 맛있어서 치차론을 추가로 주문했다. 안티꾸초를 담당했던 아저씨가 다소 시무룩해 보였다. 아마도 안티꾸초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이 남다른 듯 보였다. 식사 도중 식당 주인부부께서 우리와 사진 촬영을 하고 싶다고 말씀하셨고, 흔쾌히 사진을 찍었다. 두 분 모두 인상이 푸근하고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너무나도 감사했고 음식까지 맛있어서 행복하게 저녁식사를 할 수 있었다.
그토록 원하던 현지 분위기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로컬 맛집이었다. 맛도 훌륭했고, 선선한 바람이 부는 밤에 여유롭게 맥주 한잔에 안티꾸초를 즐길 수 있는 동네 식당의 분위기는 파란만장했던 사건들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는데 충분했다. 참으로 기나긴 1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일정에 없었던 리마에서 즐거운 추억을 쌓을 수 있었으니 이거야말로 ‘오히려 좋아!’ 가 아닐까? 감사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