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나]
여기가 도시야, 휴양지야?
아바나는 쿠바의 수도이다. 수도라 함은 정치, 경제, 행정 모든 시설이 집약되어 있는 국가의 중심 도시가 아니던가? 그런데 수도에서 휴양지의 기운이 느껴진다면 어떨까? 아바나의 첫인상이 딱 그랬다. 공항을 나서면서부터 느꼈던 아바나의 분위기는 뭔가 좀 달랐다. 와카치나에서 받은 느낌과 유사했다. 평화롭고 여유로운 휴양지에서나 느낄 법한,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와카치나는 애초에 관광, 휴양을 목적으로 설계된 도시라서 납득이 가는데, 아바나는 쿠바의 수도임에도 느긋한 기운이 도시 전체에 퍼져 있었다. 한 나라의 수도를 방문하면, 편리하지만 왠지 모르게 약간 긴장감이 맴도는, 그런 느낌이 받았는데, 아바나는 다른 수도와 비교해보면 확실히 달랐다. 그 이유를 짐작해보건대 아마 올드카가 한 몫하지 않았을까 싶다. 다른 나라에서는 쉽게 보기 힘든 올드카를, 이곳에서는 발길이 닿는 곳마다 볼 수 있으니 말이다. 이색적인 장면이 아바나를 특별하게 만든 게 아닐까? 낭만이 가득한 이 도시에 서서히 매료되기 시작했다. 독특한 분위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베다도 지역을 거닐었다.
아바나는 올드 아바나(구시가지, Old Havana), 센트로 아바나(Centro Havana), 베다도(신시가지)로 나뉘는데, 우리가 방문한 지역은 신시가지에 해당하는 베다도(Vedado)였다. 현대양식 건축물과 여러 대사관, 호텔, 고급주택이 밀집되어 있는 지역인데, 신시가지 명성에 걸맞게 세련되고 잘 정돈되어 있었다. 우리가 산책을 한 숙소 근처만 봐도 고풍스러운 외관을 자랑하는 단독주택들이 즐비해 있었고, 거리도 깔끔한, 잘 사는 동네의 모습이었다.
저녁 무렵의 혁명광장
5시가 조금 넘은 시각, 저녁을 먹기까지 아직 시간이 한참 남았다. 한적한 아바나의 저녁을 더 즐기기 위해 혁명광장으로 향했다. 광장까지 걸어가는 길은 한적함 그 자체였다.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는 하늘, 곳곳에 보이는 야자나무와 기둥이 독특하게 생긴 나무까지 페루와 볼리비아와는 또다른 풍경을 감상하는 재미가 있었다. 무엇보다 광장에 다다르니 공터에 주차되어 있는 올드카가 가장 흥미로웠다. 전시회장에서나 볼 법한 올드카가 거리 한 가운데 버젓이 있다니? 30분 정도의 짧은 산책이 이토록 흥미진진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혁명 광장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6시 무렵. 저녁 하늘은 노을이 지면서 진한 파란색에서 파스텔톤의 푸름과 붉음으로 서서히 변하고 있었다. 광장에는 투박한 전봇대와 가로등만 서 있을 뿐 벤치는 전혀 없었다. 그 외 다른 구조물도 없었다. 그저 드넓은 공터였다. 텅 빈 공간이 인상적이었다. 체 게바라와 시엔푸에고스의 얼굴 조형물이 설치된 건물 외벽은 혁명 광장의 대표적 볼거리인데, 광장이 깔끔하게 비어있어, 쿠바를 상징하는 두 인물의 얼굴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여백의 미를 잘 활용한 공간이다.
혁명 광장 주변은 정부 청사 건물 밀집 지역이었다. 체 게바라의 얼굴과 시엔푸에고스의 얼굴이 붙어 있는 건물은 각각 내무부청사와 정보통신부였고, 광장 맞은편에는 쿠바 독립에 큰 기여를 한 호세 마르티를 기념하기 위한 기념탑과 기념관이, 광장 옆에는 국립도서관이 있었다. 밋밋해 보일 수 있는 정부 청사 건물을 이런 방법으로 디자인할 수 있다는 점이 참신하고 재미있었다. 혁명광장을 실컷 감상하고, 식사하러 말레꼰 방향으로 이동했다.
아찔한 칵테일, 쿠바니토
해가 모습을 감추자 곧바로 주변에 어둠이 내려앉았고, 가로등 불빛이 길을 비추기 시작했다. 저녁식사는 호스트가 추천한 맛집에서 하기로 했다. 혁명광장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지만, 직진만 하면 되는 쉬운 코스였기에 이번에도 걸어서 이동했다. 식당까지 가는 길은 주변에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대로를 따라 양 옆으로 주택만 있었을뿐 그 흔한 식당이나 상점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걷고 있는 이 지역이 주택단지인 듯 했다.
걸어서 이동한지 1시간 정도 지났을 때 마침내 호스트가 추천했던 레스토랑(Café D La Esquina)에 도착했다. 호스트의 말대로 저녁시간이 되면 사람들로 붐비는 맛집이 맞았는지 가게는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침 야외 테라스에 자리가 비었고, 직원은 그곳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주변을 둘러보고선 깜짝 놀랐다. 레스토랑에서 근무하는 직원들도 모두 하나같이 모델처럼 생겼기 때문이다. 평소 누군가의 외모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편이지만, 공항에서도 그렇고, 식당에서 마주한 쿠바 사람들은 정말 모델 같은 비주얼이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모름지기 쿠바에 왔으면 칵테일을 마셔야 하는 법! 우리는 각자 원하는 칵테일을 주문했다(나-쿠바니토(Cubanito), B-다이키리(Daiquiri), S-쿠바타(cubata), K-모히또(mojito)) 내가 시킨 쿠바니토는 맥도날드 케첩맛으로 가득했다. 몇 번을 마셔봐도 입안에는 케찹맛이 진하게 남아 있었다. 심지어 마신 다음 올라오는 애프터가 부담스러울 만큼 무거웠다. 내가 아무리 토마토를 좋아한다고 해도 이건 도저히 다 마실 수 없었다. 강렬한 케찹맛에 정신이 혼미해져서 얼른 다이키리로 입을 헹궜다. 쿠바니토에게 강력한 펀치 몇 방을 얻어 맞은 것처럼 아찔했다. (*cubanito에 대해 검색해봤는데, 럼에 토마토 주스를 섞은 칵테일이라고 한다. 어쩐지, 케찹맛이 강하더라..)
드디어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피자, 파스타, 연어롤을 주문했는데, 전반적으로 짜지 않고 담백했다. 피자는 아주 얇은 도우에 토마토소스와 치즈가 올라가 있는 전형적인 피자의 모습이었다. 파스타는 면이 두꺼운 편이었고, 다진 돼지고기 소스가 담백하니 입맛에 맞았다. 연어롤은 아주 적은 양이었지만, 에피타이저로 입맛을 돋우기에는 괜찮았다. 쿠바의 첫 저녁식사를 푸짐하게 잘 먹었다. 쿠바니토만 아니었더라면 더 맛있었으리라.. 쿠바니토를 마시고 나서 컨디션이 확 나빠져서 조금 우울했다. 비니쿤카를 오를 때보다 더 힘든 순간이었다.
말레꼰으로 향했다. 말레꼰은 해변이라기보다 방파제처럼 보였는데, 칠흑같이 어두워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파도가 강하게 밀려오는지 인도와 바다 사이에 놓인 경계석 바로 아래까지 파도가 올라왔고, 파도가 심하게 치는 부분은 보도블록까지 흘러 들어왔다. 너무 어두워 야경은 볼 수 없었고 방파제에 올라가기엔 좀 무서워서 멀찍이 떨어진 채로 파도소리를 감상하며 길을 따라 걸었다. 정처없이 걷다가 방향을 틀어 모히또를 마시러 바(bar)로 향했다.
쿠바하면 올드카, 시가, 그리고 모히또가 아니던가! 쿠바에 왔으니 모히또를 마셔야 하는 것이 예의다. 거리를 서성이던 우리에게 다가와 본인이 일하는 가게의 모히또가 아바나에서 가장 맛있다고 말하며 호객을 하는 직원의 말에 호기심이 생겨 그곳으로 들어갔다. 저녁을 든든하게 먹어서 배가 부르기도 했고, 안주가 너무 비싸기도 해서 모히또만 주문했다. 모히또를 한 모금 마셨는데, 맛이 기대 이하였다. 너무 별로였다. 럼의 향이 너무 강했고, 설탕과 허브가 따로 놀아 전반적인 밸런스가 무너진 맛이었다. 하긴, 아바나 제일의 모히또였다면, 여행 책자에 여러 번 소개되었겠지? 기대에 미치지 못해 아쉬웠지만, 다음에 맛있는 모히또를 마실 수 있기를 기약하며 숙소로 돌아갔다.
아바나의 밤거리는 매우 어두웠다. 가로등이 곳곳에 있긴 하지만, 불빛은 약하게 거리를 비추고 있어서 음침한 기운이 맴돌았다. 주택가으로 들어서면 음산한 분위기가 강하게 풍겨 올 정도로 어둡다. 혼자서 밤거리를 돌아다니기엔 매우 위험해 보였다. 쿠스코의 밤거리보다 훨씬 더 으슥하고 무서웠다. 쿠바를 여행할 계획이라면 가급적 밤산책은 일정에서 제외하거나 단체로 돌아다니는 걸 추천한다. 숙소로 돌아와 아주 오랜만에 뜨끈한 물로 샤워를 만끽한 후 시원한 에어컨 아래 누워 담소를 나누었다. 쿠바에 다시 올 줄은 몰랐는데, 이렇게 다시 여행을 이어 나갈 수 있어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