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니다드]
트리니다드로 가는 길
숙박 요금에 조식 비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 관계로, 식사를 하려면 비용을 따로 지불해야 했다. 조식 메뉴는 빵, 소시지, 계란후라이와 각종 과일, 과일주스가 나왔다. 전형적인 조식 메뉴 구성이었는데, 신선한 과일을 푸짐하게 먹을 수 있어 참 좋았다. 1인당 5cuc을 지불했지만, 가격 대비 괜찮은 한 끼였다.
오늘은 아바나에서 트리니다드로 가야 했기에 아침식사를 마치고 나서 곧바로 호스트와 인사를 나누고 택시에 올라 탔다. 택시비는 1인당 35cuc으로 총 140cuc이 나왔다. 쿠바에 오기 전 가이드북과 여러 블로그를 조사했을 때는 100~110cuc 선에서 트리니다드까지 택시를 타고 이동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예상보다 훨씬 비쌌다. 하지만 우리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트리니다드로 가는 택시를 찾으려고 발품 팔고, 요금을 흥정하느라 시간과 비용을 소모하는 대신 조금 비싸더라도 호스트를 통해서 편하게 예약하는 편이 오히려 더 현명한 선택이었다.
트리니다드로 가는 길에서 마주한 풍경은 페루에서 경험했던 것과는 마찬가지로 다채롭고 흥미로웠다. 와카치나에서 나스카로 이동할 때는 고산지대, 드넓은 평원과 지평선, 돌산지대 등 대자연의 다양한 면모를 넋 놓고 감상하느라 지루할 틈이 없었다면, 이번에는 인위적인 것들을 구경하는 데 집중했다. 그중에서도 단연 올드카가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올드카가 지나갈 때마다 눈이 따라가기 바빴다. 어제도 올드카를 많이 봤지만,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 올드카의 매력이란.. 또 다른 올드카인 마차도 종종 보였다. 이곳에서 마차는 일반적인 교통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말을 모는 기사가 있고 그 뒤로 연결된 마차 안에 승객이 탑승하고 있었다.
가장 특이한 점은 히치하이커였다. 주변에 인가라곤 찾아볼 수 없는 도로 한복판에서 히치하이커를 쉽게 볼 수 있었다. 자녀들과 함께 히치하이킹을 하는 가족도 보였다. 이들에게 히치하이킹은 흔한 일인 듯 보였다. 교통 인프라가 제대로 발달하지 않아서 그런 걸까? 생활비에서 택시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비싸서 그런걸까? 궁금증은 해결되지 않았지만, 한번 생각해보게 되는 흥미로운 장면이었다.
쿠바는 노동자를 위한 나라임이 분명하다. 택시기사는 자연스럽게 1시간마다 휴게소에 들러 15~20분씩은 반드시 쉬었다. 우리나라였다면 휴게소는 1번만 들르고,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도착하는 것을 목표로 했을 텐데, 쿠바는 달랐다. 반드시 쉬는 시간을 가졌고 이건 오롯이 기사의 재량에 달려 있었다. 승객은 그저 운전기사의 결정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중간마다 휴식을 취한 덕분에 택시를 타고 트리니다드까지 도착하는 데 3시간 30분이 걸렸음에도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휴게소가 우리나라처럼 휴게소 안내 표지판이 설치 되어 있는 것도 아닌데 단번에 그렇게 잘 찾는지 신기했다. 어떤 휴게소는 간이매점처럼 샌드위치나 핫도그, 커피를 파는가 하면, 또 다른 곳은 작은 레스토랑이 휴게소 역할까지 겸하고 있었다. 규칙적인 휴식 시간을 가지며 이동하다가 어느 순간 저 멀리 푸른 바다가 펼쳐졌고, 트리니다드에 가까워졌음을 직감했다.
환전소 앞에서 만난 뜻밖의 행운
숙소에 도착했다. 숙소는 마치 시골 할머니 댁에 내려온 듯 정겨운 분위기지만 시설은 좋지 않았다. 우선 가장 급한 환전부터 해결해야 했다. 짐을 풀고, 환전소(Cadeca)로 향했다. 환전소는 굳게 잠겨 있었다. 불이 꺼진 환전소 안을 들여다보고, 여러 차례 문도 두들겨 봤으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환전소 앞에서 서성이는데 뒤에 계시던 어떤 아저씨가 환전소 문은 닫았다고 말해주셨다. 문 앞에 걸린 영업시간표와 안내문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토요일은 오전 11시 30분까지만 영업합니다” 낭패다. 이제 어쩌나. 지금 환전을 못한다면, 내일까지 아무것도 못 할 텐데… 주변에는 마땅히 환전할 수 있을 만한 시설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혼란에 빠진 상태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데 갑자기 마블코믹스의 만화가 스탠 리(stan lee)를 닮은 할아버지가 오시더니 환전소 바로 옆집을 가리키며 이곳에서 환전할 수 있다고 알려 주셨다. 어르신께서 문을 두드리자 어떤 아이가 문 옆 작은 창문으로 얼굴을 빼꼼 내밀어 우리를 바라보더니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주었다. 문이 열리자 그 안에서는 어떤 한국인 관광객이 환전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어르신께 감사인사를 하려고 돌아봤는데, 이미 저만치 멀리 걸어가고 계셨다. 마음 속으로 감사인사를 드린 다음 건물 내부로 들어갔다. 비록 공항 환전소보다 환율이 좋지 않아 손해를 감수해야 했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기에 환전을 했다.
사실 쿠바에서 국영 환전소(Cadeca)를 거치지 않은 환전은 모두 불법 행위라고 한다. 하지만 영업시간이 다른 나라에 비해 터무니없이 짧아서 우리처럼 곤란한 상황에 처한다면, 불법이라고 해도 암환전은 좋은 대안이다. 다만 국영 환전소보다 환율이 박하긴 하지만, 환전을 아예 못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편이다. 상황이 심각해질 뻔했으나 우연히 우리를 도와준 스탠 리 닮은 할아버지와 개인 환전상 덕분에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운 좋게 환전을 마치고, 옆 피자가게 모데나로 갔다.
모데나 피자와 트리니다드 시내 구경
모데나 피자는 트리니다드의 저가 피자로 유명하다. 이곳에서는 1,000~2,000원이면 피자를 먹을 수 있었는데, 저렴한 가격으로 피자를 먹을 수 있다는 점 덕분에 이곳의 명물이 되었다고 한다. 가게는 패스트푸드 체인점 인테리어로 꾸며졌지만, 테이블 곳곳이 지저분하고 파리가 날아다닌 탓에 위생이 좋지 않았다. 피자를 주문했는데, 작은 빵 위에 토마토소스, 햄, 치즈를 올린 게 전부였다. 피자라기 보다는 피자빵에 더 가까웠다. “저렴한 건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여행하면서 깨달은 진리인데, 이곳에서도 적용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생각보다 맛있지는 않았지만, 주린 배를 채우기엔 괜찮았다. 우리가 돈을 아껴가며 점심을 부실하게 먹은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바로 저녁에 미슐랭 맛집이자 랍스터 전문 레스토랑을 가기 위함이었다. 쿠바하면 떠오르는 것들이 많지만 랍스터도 유명하다고 한다. 저렴한 가격으로 싱싱한 랍스터를 푸짐하게 먹을 수 있다고 하니 그냥 지나칠 수 없지 않은가? 미리 예약을 하기 위해 레스토랑으로 이동했는데, 이곳은 따로 예약을 안 받지 않는다고 했다. 하는 수 없이 저녁시간에 맞춰 오기로 하고, 숙소로 돌아가 앙꼰해변으로 갈 준비를 마쳤다.
트리니다드는 쿠바의 진주라고 불리는데, 매력적인 카리브해를 품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이명이 붙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은 트리니다드를 방문하는 이유는 저마다 다양하겠지만 대부분 카리브해를 보기 위해 앙꼰 해변으로 찾는다. 트리니다드 시내에서 앙꼰 해변까지 걸어서 이동하기에는 거리가 좀 멀어서 자연스럽게 택시 산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그냥 택시도 아니고 올드카 택시라고 하니 이동하는 것부터 콘텐츠로 만들어 낸 셈이다. 앙꼰 해변 앞에는 호텔이 있지만, 너무 비싸서 대부분 관광객들은 트리니다드 중심지에 숙소를 잡은 다음 택시 한 대를 왕복 운행으로 계약해서 이용하는 식으로 앙꼰 해변을 다녀온다.
트리니다드 시내에 있는 건물들은 층고가 높지 않고 균일해서 도심의 풍경이 하늘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고, 나름의 균형미도 돋보였다. 게다가 밝은 계열의 색들로 칠해져 있어서 낮에는 도시의 색감이 알록달록해서 아름다웠다. 회색 시멘트로 도배되어 있었다면 칙칙했을 경관이지만, 다양한 색을 입히니 도시에 생기가 돌았다. 그러나 도로 상태는 지저분한 편이다. 배수 시설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서 도로 위에 오수가 흐르거나 온갖 동물 배설물이 길 위에 널려 있다. 인도가 좁은 편이라 일렬로 이동해야 하는 불편함도 있지만, 다양한 교통수단을 코앞에서 볼 수 있다는 건 재미있었다. 올드카, 마차, 비씨택시(자전거택시), 일반택시 등 한국에서 보기 힘든 교통수단을 한 곳에도 모두 볼 수 있었다. 마치 길거리 자체가 교통 수단 박물관인 듯 신선한 장면이 자주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