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성적표 좀 봐줘!
#5 잘했다, 한 마디가 갖는 힘
중학교 3학년 때였다. 나는 공부 잘하는 학생들만 간다는 사립고등학교에 가기 위해 공부에 열을 올렸다. 나름 '각' 잡고 공부를 시작한 3학년 1학기 기말고사가 끝나고 갓 채점을 마쳤을 때, 담임 선생님은 번호순으로 슥슥- 칼로 자른 긴 띠지 모양의 성적표를 나눠주셨다. 우리는 그걸 받으면 일단 가리고! 긴 종이의 가장 왼쪽부터 하나씩 펼쳐가며 자발적인 긴장감을 높였다. 국어, 수학, 영어, 사회, 과학... 평균 점수, 학급 석차, 전교 석차까지...
처음으로 학급 석차 1등을 했다. 그전에도 못한 편은 아니어서 다섯 손가락 안에는 들었지만 1등은 처음이었다. '열심히 하면 이루어진다'는 성취감을 아마 그때 처음 느꼈던 것 같다. 얼른 집에 가고 싶었다. 가서 엄마에게 가장 먼저 자랑하고 싶었다.
종례를 하자마자 한달음에 달려가 현관문을 열었다. 마침 엄마는 깔끔쟁이답게 현관에서 걸레질을 하고 있었다. "엄마, 나 성적표 나왔어! 이거 봐봐!"
앗, 이건 내가 생각한 그림이 아닌데. 처음으로 반 1등을 했다고, 무려 전교에서 2등을 했다고 말했는데도 엄마는 미소와 함께 "그래 잘했어 우리 딸~" 한 마디만 할 뿐 평소와 같은 반응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나는 더 격한 리액션을 원했는데ㅠㅠ)
그때는 우리 엄마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으레 다른 엄마들 같았다면 시험 잘 보고 나서 선물 하나쯤 사줄 법하지 않나. 게다가 어릴 적 형제자매를 위해 희생하느라 배움이 짧았던 엄마였기에, 오히려 자식인 나에게 높은 성적을 요구해도 나는 그럴 만하다고 받아들이려 했다. 물론 내가 알아서 잘하는 편이기도 했고, 엄마도 종종 한의사니, 변호사니 '사'자 직업을 읊어대긴 했지만. 정작 성적표를 받을 때마다 큰 관심을 주지 않았던 엄마였다.
그러고 보니 엄마는 내가 잘할 때도, 못할 때도 언제나 한결같이 "잘했다~"라고 말해주는 사람이었다. 내가 시험을 잘 봐도 "잘했어~." 내가 접시를 깨뜨려도 엄마의 반응은 "잘했어~" 뿐이었다. 언젠가 한 번은 엄마에게 물었다, 왜 내가 잘못을 했는데 잘했다고 하냐고. 엄마는 "이미 벌어진 일인데 뭘 어쩌고 어째~ 잘못한 것도 잘한 거시여~"라고 대답했다.
그런 엄마의 '적당한 무관심' 덕분에 나는 어떤 상황에도 개의치 않고 의연해지는 법을 배웠다. 모든 걸 잘했다고 말해주는 엄마 덕분에 쉽게 자만하지도, 쉽게 좌절하지도 않았다. 혼자서 선택하고 집중하고 해내는 법을 배웠다. 그렇게 나는 스파르타식 교육을 한 번도 받지 않고도 꿈꾸던 '스카이' 대학에 입학했다. 이 모든 건 엄마의 단 한 마디 "잘했다" 덕분이다.
사실 엄마에게 성적표를 들이밀어도 엄마가 보지 않는 이유는 글을 읽을 줄 몰라서였다. 엄마는 항상 자기는 봐도 모르니 나에게 소리 내 읽어달라고 했다.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초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엄마는 '못 배우고 자란 것'을 당신의 콤플렉스로 여기면서도 자식에게 단 한 번도 공부를 강요한 적이 없다.
엄마가 진짜 모르는 건 글이 아니다. 모르는 게 하나 있다면, 엄마가 나에게 인생 최고의 스승님이라는 걸 모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