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스레인지 불 안 켜져요!"
덩치가 커다란 아이는 안방에 있는 엄마를 향해 외쳤다.
"손 바로 떼지 말고 좀 기다려봐~"
안방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에 아이는 짜증을 부린다.
"그렇게 했는데도 자꾸 꺼지잖아요.."
결국 안방에서 나온 그녀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내 몸 밖으로 튀어나온 스위치에 가볍게 손을 대더니 오른쪽으로 돌려서 탁! 하고 가스불을 켰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그녀는 조심스레 손을 떼 본다. 불은 금세 꺼졌다.
"봐요. 안 켜진다 했잖아요."
아이의 볼부는 소리에 그녀는 대꾸하지 않은 채 다시 한번 시도를 했다. 이번에는 좀 더 오래 손을 떼지 않은 채 가만히 기다려 본다. 잠시 후 살며시 손을 뗀 그녀는 나를 한참 쳐다보았다.
"됐어.. 이제 사용해도 돼."
그녀는 등뒤에 서있는 아이에게 얘기하며 옆으로 비켜섰다.
"이제 좀 가스레인지 바꾸면 안 돼요? 엄마?"
라면 물을 내게 올리며 아이가 말했다.
"안돼. 이사 갈 때까지는 써야 돼. 이제 몇 개월 안 남았어. 불편해도 좀 참아."
단호한 그녀의 목소리에는 조금의 여지도 남아있지 않는 것 같다.
그렇다. 나는 이 집에서 22년째 살고 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그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하는 동안에도 나는 그녀의 주방을 지키고 있다.
20대의 앳되던 그녀는 40대의 아줌마가 되었고 그 사이 태어난 아이들은 훌쩍 자라 어른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여러 번의 이사를 다니기도 했다.
그 사이 나도 조금씩 늙어가고 있었던 걸까..
요즘 부쩍 몸이 예전 같지 않음을 느낀다.
내 안에 있는 에너지를 젖 먹던 힘까지 끌어 모아 보지만 몸 따로 마음 따로 정말이지 여간 속상한 게 아니다.
겨우 라면 하나 끓였는데 벌써 지친다.
잠시 쉬고 있는데 그녀가 다가왔다.
한 손에 핸드폰을 들고 뭔가를 검색하던 그녀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서랍을 마구 뒤진다.
잠시 후, 손에 튼튼하게 생긴 커다란 가위를 들고서 위풍당당하게 내게 다가 온 그녀는 가위의 쇠 부분으로 내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미처 정신 차릴 틈도 없이 한참을 그렇게 그녀에게 두들겨 맞았다. 인정사정없는 매타작을 끝내더니 그녀의 한쪽 입꼬리가 씩 하며 올라갔다. 그리고는 스위치를 딸칵 켰다.
처음 당해보는 폭력에 온몸이 산산조각 나는 듯 아팠다. 그녀가 이토록 무자비한 사람이었나?
무서워 벌벌 떨렸지만 생각과는 달리 내 몸은 한 번에 에너지를 뿜어냈다.
"어머.. 이게 되네! 아들~ 엄마가 가스레인지 고쳤어."
화가 잔뜩 나서 불길을 뿜어대는 나를 보며 그녀는 연신 환호성을 지른다.
아이 같은 그녀의 미소에 내 분노는 서서히 사그라들고 나는 그만 울고 싶어졌다.
'그래 조금만 힘을 내보자! 죽어가는 나를 또 이렇게 살려냈으니 나라도 그녀의 뜻대로 움직여주자.'
지금 가버리면 그녀가 얼마나 슬퍼할지 나는 잘 안다.
비록 몸은 욱신거리지만 좁고 불편한 집에서 오래된 물건들과 이 악물고 버티고 있는 그녀를 위해 나는 가까스로 힘을 내어보기로 마음먹었다.
오랜 시간 함께해 온 그녀와 멋지게 이별하는 그날까지.
#오래된살림 #가스레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