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선복 Apr 22. 2024

마침내 노인이 되었다

상상을 끄적이다


날이 푸름하게 밝아온다.

어김없이 오늘도 옆지기와 함께 이른 산책에 나섰다.

새벽공기가 찡하니 콧속을 파고든다.

밤새 찌뿌둥했던 몸은 호숫가 산책로에 다다를 때즈음 슬금슬금 깨어나기 시작한다.

고즈넉하게 펼쳐진 호수 풍경이 마침내 시야에 들어오고, 늘 그렇듯  잠시 걸음을 멈춘 채 고요히 그것들을 바라본다.

그러는 사이 옆지기는 나를 지나쳐 벌써 저만치 걸어가고 있다.

걸음걸이만 봐서는 누가 늙은이라 하겠는가. 살집 없어 헐렁한 바짓가랑이가 빠른 걸음걸이에 유난히 펄럭거린다.

그 뒤를 쫓아 나도 슬금슬금 걷기 시작한다. 산책하듯 가벼운 걸음은 점점 속도가 붙기 시작하더니 이내 빠른 걸음으로 바뀐다. 마음은 이미 저만치 달려가고 있는 게 분명하지만 섣불리 따라가지는 않는다. 이대로도 충분하니까.

몸은 따뜻하게 데워지고 기분은 알맞게 상쾌하다. 눈앞의 풍경을 놓치지 않을 만큼 적당한 속도로 그렇게 한참을 걷는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힐 즈음 저 멀리 옆지기가 내게 손짓을 해온다.

홀로 그네에 타 있는 모습이 아직도 철들지 않은 아이 같다. 수십 년을 봐온 익숙함속에  순간순간 찾아오는 낯선 타인 같은 그 느낌을 지우려 머리를 홱홱 저으며 그에게로 다가간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그의 옆자리에 가서 앉으니 그네가 살랑살랑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 힘들어?"

옆지기가 물어온다.

"응. 아주 좋아."


뭐가 좋다는 거지?

속으로 가만히  질문을 던져본다.


음...

그냥 다 좋은걸..


살랑살랑 그네 위 코끝을 스치는 바람냄새,

꽃내음, 하늘과 강,

그리고 그 풍경 앞에 한없이 앉아서 쉴 수 있는 이 시간, 이 게으름까지...

지금 내게 머무는 모든 것들이 다 좋다.

어쩌면 평생 이 순간을 기다려왔는지도 모르겠다. 마침내 찾아온 늙음이 하나도 서럽지 않고 오히려 반가운 이유는 이제야 떳떳하게 게으름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는 안도감에서일까.


아무튼 나는 마침내 노인이 되었고 고요한 수면 위를 하루종일 바라본다 한들 누군가 비난하진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걱정 따윈 집어치울 수 있게 되었다. 죽기 전에 실컷 게으르고 싶었는데 얼마나 다행인지.

비로소 나는 내가 된 것 같다.

그리고 내 옆에는 여전히 그 사람이 있다.






#별별챌린지

#글로성장연구소

작가의 이전글 형님, 이번 명절은 그냥 넘어가면 안 될까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