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by 순임이


아빠,

가방 속에 있던 돈 그대로 엄마 앞에 꺼내놨어.

스타킹 속에 꽁꽁 묶어둔 달러뭉치.

이걸 할머니 앞에 꺼내놨어야 하는 건데 알면서도 이상하게 내 마음이 온통 엄마에게로 향해있어서

나도 이해 안 되는 이상한 짓을 저질러버렸어.

엄마는 곧장 은행에 가자고 하더라.

그래서 엄마랑 은행 가서 내 이름으로 된 통장 만들고 갖고 온 돈 대부분을 예금했어.

새 할아버지 틀니 해야 한다고 해서 그 비용이랑 두 분 용돈 조금, 내 치과비용할 거 빼고.

나는 솔직히 더 많이 드리고 싶었는데 엄마가 그 정도만 드려도 충분하다고 하네.

마음이 편치는 않았지만 엄마 말 따르기로 했어.




가만히 앉아서 엄마가 해주는 밥 먹고 엄마가 깔아주는 잠자리에 들어가고.

아무것도 안 해도 마음이 편안했어. 엄마랑 헤어진 지 12년 만이야.

엄마랑 함께 쇼핑하고 엄마가 골라준 옷 입고 쇼핑몰 거울 앞에 서있는 내 모습이 낯설면서도 좋았어.

엄마랑 사는 건 이렇게 편한 거구나 싶은 게 꼭 꿈꾸는 것 같았어.

엄마와의 행복한 시간 뒤에는 깊은 죄책감이 몰려왔지만 모른 체 질끈 눈을 감아버렸어.

될 대로 되라지 하면서.




엄마네서 미적대다 정신이 들어서 보니 날짜가 훌쩍 지나있었어.

할머니가 서운해할까 부랴부랴 시골집으로 향하는 발걸음 가벼울 리가 없지.

아니나 다를까 봉투에 든 돈을 확인한 할머니 표정이 어두웠어.

죄인처럼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는데 할머니 넋두리가 시작됐어.


"키워봐야 소용없지. 가방 속에 든 달러뭉치 고대로 메고 지 엄마한테 갈 때부터 내가 알아봤지......."


상황은 생각했던 것보다 심각했어.

삼촌들의 비아냥거리는 소리와 차가운 눈초리를 견디는 것도 괴로운데 멀리 사는 할머니 동생분까지 찾아와서 한소리 하고 가더라 아빠.


"우리 누나가 그동안 널 어떻게 키웠는데 네가 감히 우리 누나한테 이딴 식으로 한다고 엉?"


나는 묵묵히 그 말들을 견뎠어. 어서 이 태풍이 잠잠해지기만을 기다리면서.

이미 엎질러진 물을 다시 퍼담을 수도 없고 할 수 있는 건 묵묵히 견디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어.

날 향한 공격이 멈출 때까지.




그 후폭풍은 아주 오랫동안 이어졌어. 나에게 거는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엄청났던 거지.

그 미움을 받으면서도 엄마네 집과 할머니 집을 부지런히 오갔어.

미워한다고 아예 가지 않을 수도 없고 치과 핑계로 엄마네서 좀 지내다 마음이 불편할 때쯤 되면 어김없이 할머니한테로 향했어. 시간이 멈춘듯한 고요한 시골집에서 한동안 머물다 보면, 할머니는 조금씩 누그러지고 나는 또 도시의 소음이 그리워지지.

그렇게 이방인 같은 생활을 1년 남짓 지속했던 것 같아 아빠.

여기도 저기도 내 집이 아닌 것 같은 느낌.

마음이 방황하기 시작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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